내가, 그리고 당신이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
짐을 싼다. 그곳에 두고 와도 괜찮은 것들,
그리고 그곳의 공기를 묻혀 다시 가지고 돌아올 것들.
복잡하고 귀찮아도 내심 '떠나는구나' 를 느끼게 하는 그 분주한 과정부터,
여행은 우리에게 특별한 순간을 선사한다.
자주 사용하던 물건의 일부도 여행을 위해 챙겨 넣을 때는 뭔가 다르게 느껴지지 않던가,
평소 귀찮아서 챙기지 않던 먼지쌓인 필름 카메라같은 것들, 여행을 명목으로 새로 사게 되는 새 옷,
'여행은 하기 전이 돈이 더 드나봐' 친구에게 하게 되는 볼멘소리까지.
즐겁게 소비하기 위해.
출근과 퇴근이 일상인 삶. 단순노동인지 단순노동이 아닌지 모를 일들을 나도 모르는 표정으로 반복하고 있다고 깨달을 때마다 머리 어느 언저리에서는 세포가 말을 한다. 매일 반복되는 게 일상인건 알지만 그래도 이럴 땐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시간을 버리고 싶다. 좀 신나게 쓰고 싶다. 그래, 인생은 소비와 버림의 반복이 아니던가. 그런데 참, 그렇다. 소비는 쉽고 편한데 버는 건 쉽잖고, 버리는 건 더 쉽잖다.
슬프지만 현실이 그렇다. 어쩌면 슬프지도 않은 일인지 모른다. 어떤 소설가는 한 소설에서 그런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인생이 즐겁지 않다는 걸 인정해라. 인생은 원래 재미없다. 그걸 인정해야 인생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는 거라고. 그 글줄을 처음 읽었던 13년전의 나는 무언가를 알게 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이 원래 재미없다는 것이 앞으로도 불변하지 않을 진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을 흘러오며 한 가지의 의심을 오래도록 한 이후에 나름 합리적인 추론 하나를 도출했다.
'소비하는 것을 기꺼이 즐길 수만 있다면 인생이 즐겁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소비하든, 소비하는 걸 기꺼이 즐길만한 상황으로 만들면 된다.
일상을 잠시 벗어날 준비.
여행지를 고르고 떠날 준비를 한다. 가고 싶었던 곳을 정리해보고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던 곳의 맛있는 곳을 체크한다. 지도를 보고 동선을 선으로 이어보기도 한다. 처음 가는 곳이면 생경한 지역을 입술로 읊어보거나 그곳에 대해 잘 설명된 가이드북을 구해 읽으며 필요한 부분을 스크랩하기도 하고. 한번 가본 곳이라고 해도 여행을 위한 프리뷰는 늘 두근두근하게 낯설다. ‘이번엔 이 곳을 들러야지’ ‘저번엔 여기 못 가봤으니 꼭 여기서 점심을 먹자’ 소소한 결심도 한다. 일상의 루틴을 벗어난다는 작은 일탈감으로도 여행 계획은 충분히 신나고 다채로운 색을 띄기 마련이니까.
출발하며 마주치는 풍경은 또 어떤가, 창밖 풍경은 익숙했던 풍경에서 익숙하지 않은 풍경으로 점차 옮겨간다. 새로운 곳이다, 시선이 인식하는 순간부터 여행의 특별함은 깊어진다.
가끔은 길을 잃을 기회가 필요한 우리에게.
다시 가지고 돌아갈 것. 이곳에서 기꺼이 소모하고 버릴 것들을 잘 싸서 들고, 우리는 여행지에 도착했다.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마음껏 즐길 차례다. 모르는 골목길에 머물고, 알지 못하는 곳에서 지도를 펼치고, 잠시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잃어보기도 한다. 내가 누구든 무엇이 어떻든 주어진 시간 내에서 아무것도 강요받지 않고 쫒기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시간에 내던져진다. 조금 긴장되지만 이 이름 모를 긴장감이 나쁘지는 않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조금 느긋하게 다음을 기약해도 된다. 우리는 길을 잃을 자유를 얻은 것이다. ‘이 길로 가야해요’ ‘이 시간까지 해야 해요’ 라는 데드라인에서 , 우리는 살짝 벗어났다. 여기는 내가 알지만 모르는 곳. 그래서 완벽하게 자유로울수 없는데도 그 순간, 우리는 자유로움을 얻는다.
버릴 것은 버리고, 다시 가져갈 것은 다시 싼다.
마지막 날. 어색한 곳에서 우리는 소모할 것들을 기꺼이 버릴수 있다. 혹시 마음에 이미 버렸어야 했던 무게들은 없나 잠시 생각해본다. 현실에 쫒겨 잊고 있었던 마음들이 어색한 곳에서 다시금 생각난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다시 가져갈 것들을 싸면서, 돌아갈 곳이 있다는 어쩌면 슬프고도 귀한 사실과 언젠가 또 찾아오고 싶다는 아쉬움을 함께 담게 되지 않을까,
현실에 대해 가벼운 염증이 난다면, 길을 잃어도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인일지도 모른다. 그럴때 망설임없이 여행을 '저지르기'란 사실 쉽지 않다. 따지고 들자면 우리에겐 걸림돌이 많지 않은가. 눈치를 보며 내야 하는 휴가, 저번달 카드값, 이번달의 지출 예정 비용. 시간과 돈을 들일수 있을까를 촘촘하게 생각하고 고려해야 결심을 구체화할수 있는 삶을 당연한듯이 영위하는 그/그녀, 그리고 나. 평면적이지만 그러려니, 하고 여기게 되는 것이 일상이라는 건 그다지 로맨틱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세포가 옹알거리는 시즌이라면 과감히 즐겁게 소비하고 길을 잃을 준비를 하자. 없는 여유를 우겨넣듯이 플래너에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여유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거다. 보통 여행을 하기 위해선 시간과 돈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두가지를 낼 수 있는 여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