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카메라
엄마네 집에 들르면 종종 옛날 앨범을 펼쳐보곤 한다. 오래 남은 사진들을 보다 보면, 그 사진들의 네거티브 필름을 보고 싶다는 욕구가 왕왕 올라올 때가 있다. 하얗게 불이 들어오는 라이트 박스를 켜 놓고, 루뻬로 필름을 들여다보면 반대로 뒤집힌 어떤 순간들이 오롯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 신기했었다. 라이트 박스도, 루뻬도. 필름 카메라도. 사실 사진을 취미로 하시던 아버지 덕에 처음 접하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는 사진을 찍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무언가를 남겨두는 것을 제법 좋아하신 게 아니었나 싶다. 엄마와 나, 남동생의 사진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던 사실이지만, 머리가 제법 큰 이후에도 나는 아버지가 카메라를 메고 나가시는 것을 아주 자주 보아왔다. 내가 사진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이었던 것 같다. '이게 루뻬고, 이게 라이트 박스야. 라이트 박스의 불을 켠 다음 여기, 이렇게 상이 뒤집힌 필름을 놓은 다음. 루뻬로 프레임에 맞추어 들여다보면 크게 보이지. 자 봐. 보여?' 언젠가 어린 나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셨을, 아버지의 조금 들뜬 목소리가 아직도 선연하게 들리는 것 같다.
스물넷, 처음 필름 사진을 시작했을 때,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어느 사진가가 사용하던 것을 사 온 것이라며 니콘의 필름 카메라 한 대를 건네주셨다. 카메라의 뒷커버를 열고, 필름을 제법 능숙하게 갈 수 있게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는데, 사진가들 사이에서 튼튼하고 좋은 모델이라고 여겨지는 FM2였다. 50미리 단렌즈는 내가 보는 만큼을 딱 위화감 없이 담을 수 있는 화각의 렌즈였고, 그 카메라를 처음 만난 이후로 15년 동안을 어떤 계절들을 가끔씩, 담아오고 있다. 지금은 잔고장도 잦고, 카운터도 낡아서 수리를 한다고 해도 줄곧 이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오는터라, 너도 오랜 시간을 묵은 물건이구나, 싶어 마음이 짠해지기도 하지만 이런 투박한 고장도 기계식 카메라니까 그럴싸하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한다.
요즈음은 필름을 한 롤 넣어 두면, 계절을 하나 둘 넘는 것은 예사다. 잘 들고 다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전만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담을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름 한 롤을 다시 되감는 순간만큼 설레는 순간이 또 없다. 필름 카운터를 다 감으면 카메라를 뒤집어 셔터 바로 아래쪽의 동그란 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필름을 다시 감을 준비가 된다. 위의 레버를 열어 한쪽 방향으로 필름을 감다 보면 적당한 텐션이 걸린다. 스윽 스윽 소리가 멈출 때까지 필름을 감아 카메라의 뒷뚜껑을 열고, 다 된 필름을 열어 현상소에 맡길 때까지가 끝이 아니라 현상된 컷들을 기다리는 것까지가 하나의 시퀀스다. 사진이 나오면, 그 사진을 스마트폰이나 패드, 컴퓨터로 열어 확인한다. 디지털 파일이 되어 나온 것을 업로드하거나, 마음에 드는 컷은 인화를 해 둔다. 필름 한 롤을 완성하는데 꽤 많은 품이 드는데도 여전히 필름을 끼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오롯이 느긋하게 기다리는 시간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지만 쏟아지는 이미지들 속에서도, 한 템포를 쉬어갈 수 있는 아이템들을 만나면 가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든달까. 외려 불편해서 고마운, 시간이 조금 걸려서 다행인 그런 것들이 슬슬 늘어간다. 기다리는 시간을 기꺼이 즐거워할 수 있다니. 참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