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 코스트에서 다시 만난 여행친구
여행은 만남이다. 여행은 새로운 풍경뿐만 아니라, 낯선 문화, 음식, 여행지의 독특한 풍습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여행지에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안겨준다. 우리는 이곳 호주에 도착하여 동서남북을 횡단하고 마지막 기착지인 브리즈번에서 5년 전에 유럽에서 만났던 호주 친구를 다시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친구들은 브리즈번에서 불과 70km 떨어진 휴양 도시 골드 코스트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브리즈번의 숙소를 나섰다.
1월 8일 8시 28분, 브리즈번에서 골드 코스트로 가는 기차는 정확히 예정된 시각에 출발을 했다. 우리가 호주를 떠나기 전에 골드 코스트로 가는 것은 그 유명한 서퍼스 파라다이스를 보러 가는 것도, 황금빛 모래사장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유럽여행에서 만났던 여행친구 조앤과 카멜리언이란 두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귀여운 아기 인형 마르티도 무척 보고 싶었다. 유럽에서 만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크리스마스 카드와 SNS를 서로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브리즈번에 도착을 하여 조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미스터 초이 호주에 오신 것을 매우 환영합니다. 꼭 만나고 싶으니 제발 골드 코스트에 들려주세요."라고 하면서 "Please, Come here"를 몇 번이나 말했다. 흔히 말하는 인사치레가 아니가 진심이 담긴 말이라는 것을 가슴속으로 깊게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는 5년 전 11월, 은혼식 기념으로 유럽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이 두 친구를 만났었다. 조앤은 중등학교 체육교사이고, 카멜리언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라고 했다. 두 사람 다 결혼을 하지 않고 싱글 우먼들이었다. 런던을 출발하여 도버해협을 지나는 배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만났다. 그리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날 저녁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서로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여인은 호주 골드 코스트에 살고 있는데 겨울방학기간 동안 유럽 일주 여행을 하고 있다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나는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아내와 함께 한 달간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소개를 했다.
"오, 두 분은 이번 여행에 빅 데이를 맞이하겠네요? 그날이 언제지요?"
"네, 11월 11일 11시랍니다."
"호호호, 11일 11시? 1자가 6개나 되는군요. 기억하기도 매우 쉽겠어요?"
"하하, 그런 셈이지요. 한국에서는 이날을 '빼빼로 데이(Pepero Day)'라고 불러요. 이 특별한 날자 때문에 우린 결혼기념일을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답니다."
"호호호, 빼빼로 데이, 그것 참 재미있군요."
"내가 젓가락처럼 마르게 보여서 저절로 기억이 된답니다. 하하."
두 여인도 유별난 여행자들이었다. 조앤은 항상 작은 곰 인형을 하나 들고 다녔다. 하얗고 깜찍한 아기 곰 인형이었다. 그 인형의 이름은 '마르티(Marty)'라고 불렀다. 마르티는 소녀라고 했다. 유럽 일주 여행을 하던 중 우리는 두 여인과 그리고 인형 마르티와도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하며 우리는 여러 가지 추억을 갖게 되었다. 그중에 잊지 못할 추억 한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암스테르담과 비엔나를 거쳐 베니스에 도착하게 되었다. 같은 호텔에 머물렀던 우리는 다음날 산 마르틴 광장으로 가기 위해 같은 버스를 탔다. 먼저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우리 뒤를 따라 올라온 조앤이 갑자기 우리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며 말했다.
"미스터 초이 앤드 팍, 해피 애니버서리! 투~유!"
우리들에게 장미꽃을 선물한 후 조앤과 카멜리언은 실버웨딩을 축하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두 여인의 선창에 버스에 탄 사람들이 순식간에 함께 박수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 주었다. 서양인들은 결혼기념일에도 축하파티를 여는데, 결혼 25주년이 되는 은혼식을 가장 성대하게 치른다고 한다. 조앤과 카멜리언이 서로 소개를 할 때 내가 말했던 우리들의 결혼기념일을 잊지 않고 갑자기 깜짝 이벤트를 벌린 것이다.
우리는 부라노 섬으로 함께 가서 가재요리를 먹었다. 그때 조앤은 어디서 사 왔는지 축하 케이크에 촛불까지 켜놓고 우리들의 은혼식을 축하해 주었다. '오, 이 기쁨 감격을 어찌할꼬!' 얼떨결에 버스 안의 관중들로부터 은혼식 축하를 받은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스러워했다. 사람은 너무 기뻐도, 너무 슬퍼도 눈물이 나온다. 나 역시 코끝에 시큰해졌다. 우리 생애 가장 큰 축복을 받는 순간이었다.
여행은 풍경을 보는 것 이상이다. 여행은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또한 여행은 어떤 사람들과 함께 다니느냐에 따라 그 여행의 질과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그때가 그랬다. 그 여행에서 헤어진 후에도 우리는 매년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으며 아름다운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카드를 보낼 때마다 조앤은 발신자를 "From Jo, Carmel and Marty"라고 썼고, 내가 보내는 카드에는 수신자를 "To Jo, Carmel and Marty"라고 썼다. 우리들은 서로 마르티 인형을 잊지 않고 마르티에게도 안부를 전하고 물었다. 그로부터 5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우리는 그리운 친구들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브리즈번에서 골드 코스트까지는 기차로 1시간 정도 걸렸다. 네랑(Nerang) 역에 내려야 하는데 잠시 그들을 만난 생각을 하다가 지나쳐서 로비나(Robina) 역까지 가고 말았다. 우리는 다시 네랑 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10시 10분 네랑 역에 도착을 하여 조앤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조앤, 여기 초이에요. 지금 막 도착했어요.”
“오, 초이! 드디어 왔군요. 그런데 내가 지금 수업 중이라 마중을 나가지 못하는데 어쩌지요?”
“상관없어요. 우리가 버스를 타고 그리로 가지요. 약속 장소만 알려 주세요.”
“그럼 버스를 타고 서퍼스 파라다이스에 내려서 바로 해변 가에 위치한 맥도널드에서 만나요. 1시간 후면 수업이 끝나니 바로 그리로 갈게요.”
“오케이, 카멜리언과 마티도 함께 올 거지요?
“물론이지요. 나중에 만나요.”
조앤은 수업 중이라 픽업을 나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며 조앤은 서퍼스 파라다이스 맥도널드에서 만나자고 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서퍼스 파라다이스 비치로 갔다. 맥도널드는 서퍼서 파라다이스 비치 바로 옆 해변에 있었다. 거리엔 서퍼스들의 천국을 상징하는 윈드서핑 보드가 여기저기 도열해 있었다. 파도소리가 철썩철썩 들려왔다. 맥도널드 가게 앞에는 황금빛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로비에 앉아 황금빛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조앤과 카멜리언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조앤의 품에는 그 곰인형 마르티가 함께하고 있었다.
"와우! 초이! 팍! 롱 타임 노 씨!"
"조앤, 카멜리언! 너무 반가워요!"
"골드 코스트에 온 것을 매우 환영해요!"
"마르티, 그동안 잘 있었어!"
우리는 서로 포옹을 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조앤이 아기 곰 인형 마르티를 아내에게 건네주자 아내는 마르티를 받아 들고 인형에게 입맞춤을 했다. 마르티는 마치 살아있는 아기 곰 같았다. 유럽여행 중에도 아내는 종종 마르티를 앉고 다녔기에 이미 듬뿍 정이 들어 있었다. 여행은 만남의 기쁨이 가장 크다. 세계일주 중에서도 가장 즐겁고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마르티는 멋진 모자를 쓰고 핸드백까지 걸치고 나왔다. 마르티의 모자는 유럽여행 때 베니스에서 산 것이고, 핸드백은 스코틀랜드에서 산 것이란다. 거기에다 마르티는 우리들이 베니스 부라노 섬에서 사주었던 레이스를 두르고 있었다. 마르티의 목에 두른 레이스를 보는 순간 우리는 또 한 번 진한 감동을 받았다. 조앤은 우리가 부라노 섬에서 은혼식 기념으로 케이크에 촛불을 켜놓고 함께 찍었던 앨범까지 들고 나왔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의 앨범이었다. 우리는 추억의 앨범을 넘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초이, 당신은 참으로 대단해요!"
"뭐가요?"
"이렇게 아픈 팍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하다니 말이요."
"속이 텅 비어서 그렇지요. 지금은 팍이 아픈 게 아니라 내가 아파요. 하하하."
"정말 그렇게 보이네요. 호호호."
우리는 조앤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골드 코스트 근교를 돌아보았다. 황금빛 모래사장이 끝없이 이어지는 골드 코스트는 서퍼들의 천국이다. 서퍼스 파라다이스를 중심으로 총 78km에 달한다는 해변에는 1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를 않는다.
은빛 파도가 부서지는 황금빛 모래사장을 걸으며 우리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해변을 걷다가 우리는 고급 요트가 즐비하게 정박해 있는 어느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포구에는 곤돌라처럼 생긴 예쁜 요트가 있는가 하면 호화주택처럼 거대한 요트도 있었다. 호주의 부자들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바다 위의 호화주택이었다. 각자 구미에 맞는 시 푸드를 시키고 조앤이 우리들을 위하여 와인을 한 병 샀다.
“초이, 금년엔 결혼 몇 주년이지요?”
“어디 보자 그러니까, 벌써 30주년이 되었네요.”
“초이, 결혼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우리는 포도주 잔을 높이 쳐들고 마주치며 축하 겸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베니스의 부라노 섬에서 은혼식을 축하해 주었던 때처럼 조앤과 카멜리언은 진심으로 우리들을 환영하며 축하를 해주고 있었다. 마르티의 표정이 더욱 귀엽게 보였다. 그들은 또 한 번 우리들에게 감동을 먹여주고 있었다. 그동안의 여행담을 주고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앤과 카멜리언은 우리를 네랑 역까지 데려다주었다. 기차가 출발할 시간이 다 되어가자 조앤은 가방에서 인형 하나를 꺼내 들었다.
"미시즈 팍, 이 아이는 스탠리라는 인형이야. 마르티보다 한 살을 더 먹었어."
"오우, 스탠리?"
"응, 마르티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 친구야.”
“참 미남으로 생겼네. 마르티가 좋아할 만도 하겠어요.”
“응, 이 스탠리는 내가 7년 동안 함께 살아온 인형인데 골드 코스트에 온 기념으로 초이 부부에게 선물하고 싶어."
"아니, 그렇게 소중한 인형을? 마르티가 섭섭해 할 텐데."
“괜찮아. 자 받아요.”
조앤은 스탠리를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마르티는 여자 아기 곰이고, 스탠리는 남자 아기 곰이라고 했다. 두 인형은 마치 자매처럼 조앤과 함께 살아왔다는 것. 스탠리의 발바닥에는 "JA"라는 조앤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스탠리 인형을 받아 든 아내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 역시 가슴이 뭉클해졌다. 카멜리언이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 마크는 골드 코스트를 상징하는 마크로 골드 코스트 시장이 나에게 선물로 준 것인데 골드 코스트 방문 기념으로 초이 부부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요."
"아니, 그렇게 소중한 마크를 받아도 되나요?"
"괜찮아요. 스탠리와 함께 선물하고 싶어요."
"카멜리언, 고마워요!"
카멜리언은 스탠리의 가슴에 호주 국기가 그려진 조그마한 마크를 달아주었다. 마크를 가슴에 단 스탠리가 의기양양하게 보였다. 스탠리는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귀한 선물이었다. 그것은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서양인들의 풍습으로 보아서는 매우 귀한 존재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소장품을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한다고 한다. 7년 동안 조앤이 분신처럼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스탠리 인형, 그리고 골드 코스트 시장으로부터 받은 기념마크! 이런 물건들은 돈을 아무리 준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값진 것들이었다.
"조앤, 마르티의 표정이 울상인데. 정말 스탠리를 데리고 가도 될까?'
"괜찮아. 그 대신 스탠리를 잘 보살펴 줘요.”
"그러고 보니 스탠리도 슬픈 표정이네!"
그랬다. 비록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인형들은 이별을 슬퍼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기차가 출발을 했다. 우리는 스탠리를 창가에 내밀며 조앤과 카멜리언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앤과 카멜리언은 마르티를 앉고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마치 입양을 하듯 스탠리를 소중하게 안고 조앤과 카멜리언, 그리고 마르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들도 기차가 멀어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여행은 만남과 이별이다.
안녕! 나의 친구 조앤, 카멜리언! 그리고 마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