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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yalko May 09. 2023

2천억이 생긴다면

니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뭐니

얼마 전 회사 동료들과 카페에 둘러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페이스북 오피스에 그라피티를 그려준 댓가를 페이스북 주식으로 받아 2천억원을 손에 쥔 어떤 예술가 이야기를 하던 때였다. 


"우와 너무 좋겠다"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마음의 소리가 도화선이 되어, 어느새 우리는 "2천억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에 대해 각자 돌아가면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총 다섯 명이었는데 나 빼고 모두가 하나같이, 정말 하나같이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응? 여행을 꼭 2천억이 있어야 가는건가, 지금도 갈 수 있잖아. 


"2천억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란 질문은 각자의 방식대로 해석되고 있었다. 나의 대답은 "내게 2천억이 생겼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였는데, 다들 어이없어 했다. 무엇을 하겠냐고 묻는데, 무엇을 안 하겠다로 답하는 게 허탈했겠지만... 나는 저 질문을 '2천억이 생긴 후 당장 무슨 일부터 할 것인가요'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나는 일단은 내가 영위하고 있던 일상을 멈출 생각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여행'이라고 답한 다른 사람들은 - 모르긴 몰라도 - 2천억이 생기면, 

(1) 숙박이나 비행에 드는 예산을 굳이 따져보지 않고 

(2) 본업을 관두어 업무 일정, 휴가 일정 따위 눈치보지 않고 

어디든 훌쩍 떠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느냐, 란 의미였지 않을까 한다. 


(1)의 의미에서, '지금도 갈 수 있는 여행'과 구분되는 것이었을테다. 

(2)의 의미에서, 2천억이 생겨도 내가 하는 일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내 생각과는 조금 달라보인다. 


아니, 여행이라함은 여행이 직업이 아닌 이상 일상 밖의 단발성 이벤트 아닌가. 2천억이 생기면 무엇을 하고싶냐는 질문에 어떻게 모두가 여행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 것일까. 일상을 너무 벗어나고 싶은걸까. 일상이 그만큼 괴로운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재밌는 일'이 그냥 여행으로 귀결된 것일까. 


그래서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나는 정말 2천억이 생기면 뭘하고 싶은지.


2천억을 은행에 넣어놓는다고 생각해보자. 2% 연이율로 치면 1년에 40억을 이자로 받는다. 네이버에서 이자소득에 대한 소득세를 검색해보니 이자소득이 2천만원이 넘어가면 최대 49.5%를 소득세로 납부해야 한다고 하네. 그럼 손에 남는 돈 20억. 절반을 소득세로 빼앗기는 것은 좀 억울하긴 한데, 지금의 내 기준으로는 뭐 나쁘지 않다. 2천억은 손에 대지도 않고 20억이 현금으로 들어온다니 생각만해도 황홀하군. 


가족에게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우리 회사가 하는 투자가 잘 되어 몇 십억 정도의 인센티브를 받게 되었다고 뻥을 칠 예정이다. 가족에게 주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딸에게, 동생에게 2천억이 생겼다는 것을 알면 많은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될텐데, 그 복잡한 생각은 불화를 낳고 그 불화는 곧 우리 불행의 시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집을 살까. 우리 모모가 뛰어놀 수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전원주택을 서울 한복판에 장만하는 것이지. 대충 얼마나 들까. 100억? 크기는 클 필요가 없다. 세금 포함해서 100억원 수준을 집을 사는 데 쓴다고 치자. 남은 돈 1900억원. 연 이자소득 19억. 


자 그럼 이제 뭐하지. 그 날 동료 중 하나가 '여행 말고 하고 싶은 일 없어요?'란 질문에 '학교를 짓고 싶다'는 이야기가 했다. 아, 난 뭐 정말 하고 싶은 거 없나? 진짜 없나.  


진짜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다. 그냥 지금 하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이 내게 가장 안정감을 준다는 것 밖에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안정감, 혹은 다른 말로 항상성 말고 더 중요한 게 있을까. '행복'이라는 관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사십오년 정도 모은 데이터에 의해 컨디션과 감정의 높낮이를 모두 어제와, 혹은 조금 전과 유사하게 유지하여 심리적 안정감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행복'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삶이 항상 어제와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달라졌고, 발전했고, 진화했다. 내가 아주 조금씩 진화하는 사이에 자연스레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긴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소중한 인연들이 추려졌고 또 그 위에 새로운 소중한 인연들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결국 내게 안정감있는 삶이란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변화가 있고, 그 변화의 방향성이 내가 바라는 바여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방향성이 옳다고 하더라도 - 일단 2천억이 생긴다는 게 옳은 방향이라고 치자 - 그 변화의 폭이 너무 크다면 그것은 안정감을 해치고 그래서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게 분명하다. 혹시 내게 저 큰 돈이 있는 줄 알면 만나게 되는 사람, 어울리는 사람들도 매우 달라질 것이다. 그 동안은 접근하기 어려웠던 정보를 알게 될 것이고,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생각만해도 너무 두렵다. 


그리고, 오늘 하는 일을 내일 계속하더라도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는 걸 나는 스스로 방증하고 있지 않은가. 15년 전 나는 박사가 되겠다고 미국엘 가 있었고, 10년 전 나는 공부를 관두고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여 신나게 해외 출장을 다니고 있었으며, 5년 전 나는 갑작스레 맡게 된 투자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이 일을 어떻게 하면 계속할 수 있을지 막연히 생각만 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방금 북유럽에 출장을 가 있는 모 그룹사의 아시아 투자팀 헤드와 zoom meeting을 하면서 우리 회사의 신규 펀드 전략을 설명하는 콜을 마쳤고. 하던 일을 계속 열심히 하는 것은 변화없는 삶을 산다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엇, 얘기가 일 얘기로 번지려고 한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돈 얘기로. 그래, 갑자기 큰 돈이 생겼다고해서 뭔가 새로운 일을 꾸미려 하지 말고 지금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인당 1억에서 최대 5억까지 나눠주도록 하자. 우리 가족들, 내 소중한 친구들. 인당 얼마씩 할애할 지 정해두되, 한꺼번에 주지 않고 그들이 어려울 때 조금씩 나누어서 필요한만큼 일단 주도록 하자. 최고액을 5억으로 잡은 이유는, 5억 정도는 어떤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준의 돈은 아니기 때문이다. 10억으로 썼다가 5억으로 낮추었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계속 안정감을 갖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목돈은 어느 정도인지 먼저 계산이 필요해 보인다. 연 현금흐름 5억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그럼 500억. 


그럼 남은 돈 1500억원을 최대 5억원씩 나누어줘야 하는데 그럼 최소 300명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내가 돈을 나누어 주면서 그 인생이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은 기껏해야 20명? 30명? 밖에 안 될 것 같은데 300명은 너무 많다. 20명 기준으로 100억. 그래 1500억씩이나 내게 필요가 없다. 새로이 소중한 인연을 만드는 게 더 어려워 보인다. 


정리해보면, 내겐 700억만 있으면 된다. 


서울 한복판 마당이 딸린 집 100억 + 은행에만 넣어놔도 쓰고 넘칠 정도의 현금흐름을 창출할 원금 500억 +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100억 = 총 700억 


아 그러니까 신이시여 제게 절대 700억을 초과해서 주시지 마시길. 필요한 금액 이상을 주시면 그걸 또 어디에 기부해야 됩니다. 그것마저 골치아파지면 그냥 불태워 버릴 거에요. 


그리고 나는 그냥 지금 살고 있는 일상을 그대로 살겠어요. 혹시 기력이 달린다 싶으면 좀 쉬어가면서 일할건데, 그건 700억이 없더라도 그렇게 할 겁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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