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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아저씨 Aug 10. 2019

부족한 대로 경력기술서 쓰기

자신을 정리해 보아요. 대신 조금만 짧게.

INTRO. 우리는 가끔 상대적으로 덜 필요한 물건을 산다.


엊그제인가. 어머니 홍삼농축액을 하나 사 드리려고 (참고로 홍삼농축액은 30일분에 원가가 1.5만원 정도이다. 그리고 그 중 1/3이 박스값이다. 통탄할 일이다) 온라인 쇼핑을 했었다. 그리고 다음날 배송 온 택배상자에는 어쩐 일인지 초록입 홍합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에게 가장 필요한 건 갱년기를 이겨낼 수 있는 홍삼이었건만, 요즘 무릎이 좀 안 좋다는 제 2의 필요를 들었던 것과, 하필이면 그때 본 초록입 홍합 상세페이지가 꽤 그럴싸 했다는 것, 나름 수긍할 만한 가격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때문이라고 굳이 합리화를 해 보았다.

물론 초록입홍합도 환 제품의 경우 원가가 비싸봐야 30일분에 7,000원 조금 넘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재고 또 재긴 했지만, 마침 떠오른 제 2의 필요를 그냥 넘기지 못했다. 이렇게 머리와 행동은 다소 틀릴 때가 있다.


1. 경력기술서는 일종의 내 자신에 대한 상세페이지와 같다.


제품을 살 때 혹하는 (또는 호구 잡히는) 이유 중 하나는 말끔한 상세페이지의 역할이 크다. 식품업계에서 옛날에 헬로네이처가 성공했던 포인트이기도 하고, 마켓컬리가 새벽배송 전에 떴던 이유이기도 하다. MD들을 만나 내가 파는 물건들에 대해 딜을 진행할 때 상세페이지부터 일단 잘 해 놓을 것, 또는 최적화라는 것을 시키라는 이야기를 엄청나게 듣는 이유다.


이직이나 입사지원도 마찬가지로 회사 입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대안들 중에 나를 사가게 만드는 온라인 시장의 행태랑 같다고 보면 된다. 이 때 우리가 쓰는 경력기술서는 인사담당자나 경영진들을 혹하게 하는 상품기술서 또는 상세페이지와 같다. 뭐, 가끔 진짜 좋은 제품을 최저가에 무료배송 걸어서 엄청난 구매수와 리뷰수를 갖춘 최상위 제품들이 존재해서 넘지 못할 아성을 보여주듯이, 입사지원 판에도 스펙을 둘둘 말아서 시장에 나온 존재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 사람들은 별도로 하자. 우리의 포지션은 오픈마켓에서 2위에서 3위만 되도 충분하다.


만약 당신이 경쟁시장에서 고만고만한 제품을 파는 셀러라면, 상세페이지 최상단에 무슨 말을 쓸 지 부터 같이 한 번 고민해 보자. 힌트는 보통 직장인들이 보고서를 쓰는 방식이다.


2. USP (Unique Selling Point)


맞다. 온라인 소비자는 지나치게 긴 정보를 다 보지도 않기 때문에 (반면 제대로 안 보고 불필요한 제품을 사 놓고서는 소비자보호원 어쩌고 하며 협박하는 진상들도 있지만, 다행히 입사에는 이런 관계는 없다.), 최상단에 들어갈 것은 당신 제품을 사야 될 가장 강력한 셀링포인트의 축약이다. 이는 이벤트 배너가 될 수도 있고, 미디어 커머스 타입이라면 실험실 영상 같은 것들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자신이라는 인적 서비스 리소스를 시장에 판매함에 있어서, 문서안에서 유투브 영상같은 걸 보여줄 수는 없으므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최소 5개 이상' 의 각각 한 줄 짜리 업무상 강점이다.

예를 들어 같은 상품기획을 한다고 했을 때, 입사하고자 하는 기업의 유형에 따라 한 가지 제품군만 아주 전문적으로 했던 사람의 경력이, 또는 어쩌다 보니 FMCG 전반을 다 할 줄 아는 사람의 경력이 서로 다르게 강점으로 어필될 수 있다. 이러한 경력 USP를 쓰는 나 나름의 문법은 다음과 같다.


1번 USP. 업무상 최상위 강점 - 한 업무의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하게 되었을 때 무리 없는 업무영역

2번 USP. 업무 차상위 강점 - 1번 업무를 하면서 부가적으로 익힌 기술들. (예를 들어 재무인데 HR을 배운 것)

3번 USP. 1번을 만든 인적 근거들 - 예를 들면 제조공장 네트워크 대표급들 보유, 온라인 판매처 00개 보유
4번 USP. 1번을 만든 숫자적 근거들 - 예를 들면 담당제품 평균 매출 00% 향상 유지, LOAS 000% 유지 등

5번 USP. 1번을 만든 행동론적 근거들 - 예를 들면 원가분석 및 수립, 채널 별 판매가격 설정 업무 진행


온라인 몰에서 제품이 싸서 잘 팔린다고 USP에 '가성비 높은 인재' 같은 말은 우리 쓰지 말기로 하자.


저 5가지 문법을 통해 내가 어필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 집중업무 영역에 자신감을 갖고 디테일하게 임할 수 있다는 것이며, 부가적으로 필요에 따라 멀티플레잉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는 것, 또는 업무를 진행하면서 코웍하게 될 가장 긴밀한 관계의 부서들이 가진 톤앤매너를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대부분 주업무와 코웍을 통해 업무의 발전이 이뤄진다고 믿고 있기에 차상위 강점은 오히려 최상위 강점보다 빛을 발할 때가 많았고, 이전에 기록했던 헤드헌팅의 경우에도 내 주업무가 아니더라도 근사치의 업무경험을 통해서 제안을 받을 때도 많았던 만큼 꼭 기재해야 할 주요한 요인이 아닐까 한다.


3. 상세페이지에도 흐름이 있다 - 플롯의 수립


내가 모시는 현 회사 대표님은 '역피라미드 구조' 라는 것을 굉장히 선호하신다.

사실 아직 이 의미를 클리어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포괄적인 내용부터 점점 중요한 내용으로 전개를 뾰족히 가져가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은데, 소비자 입장에서 상세페이지를 볼때 체류시간 1분 안에 구매의사 결정이 된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다른 의미의 대표님 나름의 해석이 아닐까도 싶다.


중요한 것은, 피라미드 구조이던 역피라미드 구조이던 USP를 제공한 이후 다음에 나올 내용은 장황한 소설이 아니다. 절대 길게 쓰면 안되는데 흔히 문장식으로 각 회사에서 했던 일들을 쓰는 분들이 많다. 나 역시 길게 쓰는걸 좋아하지만 경력기술서는 그렇게 되면 안된다. 문장이 아닌 단어이고, 문장은 내용 당 한 문장을 넘지 않으며, 문장은 단어와 숫자로 구성되어야 한다. 소설을 쓰는게 아니라, 우리가 문학이나 글쓰기 시간에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배웠던 '플롯' 이 그냥 경력기술서의 전부라는 것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플롯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될 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A. 기업정보 요약

 - 기업명 / 기업의 유형 (법인, 개인) / 근로자 수 / 가장 최근 연 매출액 / 매출 주력 상품 또는 서비스

B. 기업에서의 내 정보

 - 소속 팀 / 직급 / 중간관리자의 경우 이끌었던 팀원의 수

C. 업무 정리


C는 다시 다음과 같은 플롯으로 세분화 될 수 있다.


C-1. 주요 업무

 C-1-1. 주요 업무 1 : 핵심 실무 영역

 C-1-2. 주요 업무 2 : 핵심 실무 영역 2 또는 부차적 실무 영역

 C-1-3. 주요 업무 3 : 부차적 실무 영역 2 또는 중간관리자일 때 인적자원 관리 업무


위의 C 항을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C-1. 주요 업무

 C-1-1. 아미노산 제품 (정제, 분말제, 액상제) SKU 7종 개발 및 기획 총괄

 C-1-2. 아미노산 제품 연간 유통기획 및 마케팅 기획 수립, 제품 원가 책정과 유통 채널 별 판매가격 설정

 C-1-3. 상품기획 팀원 반기별 R&R 효율성 체크, 인별 KPI 관리, 업무 교육 (WBS 작성, OEM 실무)


상기 문장 작성법에서 나름의 팁 하나가 있다면, 허세라면 허세일 수 있지만 내 경우에는 회사에서 영문으로 통용되는 몇 가지 단어들은 가급적 영문 그대로 적어주고 어떻게든 숫자를 붙여주는 것이다.

즉, 설명하는 한 줄이 국문 + 영문 + 숫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제품 상세페이지에서 멋진 GIF 움짤이나 고화질의 디지털 사진이 적용된 것과 같은 소구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견해이다, 씁슬한 면도 사실 있는데, 그건 인간적인 감정이고 우리가 추구할 것은 효율성과 합리성이다.


그런데 C 항목의 경우 플롯타입으로 정리하지 않는 경우, 경력기술서는 다음과 같이 나오게 된다.


저는 매출액 000원 규모의 000를 생산하는 회사인 0000에서 0000팀 팀장으로서, 아미노산 원료를 가지고 다양한 제형의 제품을 개발, 기획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단지 개발기획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판매와 인지도 상승을 위해 SNS 중심의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고 유관부서와 함께 시행과정을 논의하는......


이미 C-1-2의 앞단을 표현하는 데 세 줄을 다 써 버렸다. 시간이 금인 인사담당자 입장에서는 이미 상세페이지 이탈율이 높아질 상황이다. 구체적인 사항은 관심이 있다면 당신과의 면접에서 디테일하게 물어볼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한 당신을 위해 D 항목이 준비되어 있다.


D. 업무 상 주요 성과

 

업무 상 주요 성과는 어쩌면 가장 많이, 길게 쓰고 싶은 부분이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부분은 화장품이나 식품 상세페이지로 따지면 주원료, 부원료 이야기처럼 눈에 차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고, 인사담당자 입장에서는 당장 검증할 길이 없기 때문에 자기자랑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을 곰곰 생각해보자. 이렇게 되면 역시 답은 '자랑 당 한줄' 이며 '국문+영문+숫자' 의 조합으로서 문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축약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AK 백화점 테넌트 행사를 통해 SKU당 월 매출 200만원 > 500만원으로 250% 향상

- 오픈마켓 CPC 및 입찰광고 지속 관리를 통해 입사 전 대비 품목 LOAS 170% > 320%로 향상

- HRD 운영 시 사내강사제도 도입으로 교육비 00% 증감, 교육생 만족도 5점척도 기준 3.8 > 4.2로 향상


D를 써내려 갈 때 한 가지 팁이 있다면,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이직이 많기도 하고 한 직장에서 오래 되신 분들 또한 있을 것이다. 전자라면 D를 5-7개 정도면 쓸 것을 추천하며, 후자라고 한다면 해당 업무의 플로우 별로 개선된 점들을 3-5개씩 나열하도록 하자. 즉, 후자의 경우 D-1, D-2의 항목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4. 이직 사유 쓰기 - 구구절절한 사연은 연봉을 깎을 뿐이다.


이직 사유는 상세페이지에서 마지막에 절박하게 고객에게 셀러들이 안내하는 제품 구입 시 유의사항과 같다.

인사담당자 또한 이 부분을 굉장히 네거티브하게 접근하면서, 어쩌면 제일 집중해서 읽기 때문이다.

고객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단순 변심에 의한 반품으로 인한 배송비를 물지 않고 싶어서 애쓰는 정보의 영역이며, 인사담당자 입장에서는 솔직히 인재가 좋았을 때 회사 내규에 준하는 연봉 또는 연봉 동결, 삭감으로서 인건비를 최소화하며 좋은 인재를 영입하려는 구실이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직 사유는 아주 제일 간결해야 한다.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해야 한다. 트집거리를 주면 안된다.

물론, 이직이라는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 엄청난 인생사와 고민과 갈등이 있어서 인사담당자에게라도 이를 호소하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회사는 자선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직의 스토리가 긴 만큼 당신의 연봉은 점점 깎인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이직 사유는 한 문장도 길다. 최대 한 문장의 절반 또는 간단한 단어로 끝내자.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 대학원 진학 / 유학

- 보직 변경으로 인한 커리어 단절 우려

- 연봉 및 복지처우 상 이견

- 소속 팀 해체 / 회사 폐업

- 개인 사유 (이 때 질병이 있다면 '질병' 같이 강한 단어보다는 '장기간 병원 치료' 등으로 우회하자)




좋은 경력기술서에는 사실 답도, 왕도도 없다. 다만 경험 상 경력기술서란 회사 문서의 한 종류이자 보고서의 형태이기 때문에 에세이가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력기술서에서 쓴 말들은 자신이 입사 후 실무를 진행하였을 때 책임질 수 있는 숫자와 경험이어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과장과대광고로 제품을 파는 업체들은 당장의 단기 매출은 좋을 지 몰라도 언제든 사기죄로 기업이 고꾸라 질 수 있는 것 처럼 책임질 수 없는 숫자와 결과로 경력기술서를 채우는 것은 인사담당자를 단기에 현혹할 수 있어도 입사 전 평판 조회, 그리고 실제 실무를 통해서 언제든 민낮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해고는 회사의 부덕이 아니다.


그리고 경력기술서의 내용은 자기소개서에서 좀 더 자세하게 풀어내는 것도 좋다. 이력서에서 자기소개서는 자서전을 쓰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 자신의 모습, 회사에서 내 자신의 모습, 회사에 나를 좀 더 자세히 프레젠테이션 하는 공간으로서 활용될 때 가장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경력기술서에 에세이 쓰지 말자는 것이다. 정리 하나만으로 충분히 예쁜 경력기술서가 나온다.

쓰다가 머리아프면 너바나의 Territorial Pissing 이라는 노래를 시원하게 한 번 듣고 오는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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