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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빈 Nov 01. 2021

관객을 전복하는 영화

<듄>이 극장을 통해 제공하는 카타르시스

극장은 관객의 믿음이 이뤄지는 곳이다. 이 믿음은 영화를 본다는 사실을 잊게 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를 이동시킬 거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이 허구의 이야기, 만들어진 그림들이 가짜라는 걸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 몰입감을 위해 더 큰 화면과 더 압도적인 소리가 필요하다. 극장이 주는 이 믿음은 넷플릭스로는 도저히 구현해내지 못하는 종류의 카타르시스다.


드니 빌뇌브의 <듄>은 관객을 잠시나마 다른 세계로 옮겨놓겠다는 극장의 목표를 정확하게 이행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듄>은 말 그대로 영화다. 영화는 극장에 있어야 한다. 나는 <듄>을 극장에서 봤기에 10191년이라는 배경, 아라키스라는 사막 행성, 메시아가 될 존재라는 폴 아트레이데스, 스파이스라는 환각제, 우주 제국 내의 권력 다툼 같은 얘기들을 온전히 다 진짜라고 믿었다. <듄>은 오랜만에 체험한 전복(顚覆)의 영화였다.


이 영화에 약점이 많다는 걸 안다. 특히 스토리가 촘촘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같은 의견을 수긍하면서도 동의할 순 없다. 다소 성겨보이는 이 이야기가 내겐 무능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된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방대한 원작 소설을 영화에 다 담을 순 없기에 이야기를 풀어내는 대신 이미지로 형상화해야 했다. 나는 원작을 전혀 모르지만, <듄>의 건조함과 끈적함과 명확함과 흐릿함과 뜨거움과 차가움과 빛과 어둠과 거대함과 왜소함의 그림들로 그 세계를 추측한다. 영화의 역할은 이정도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티모시 샬라메. <듄>은 샬라메의 영화다. 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불안의 기운이 그에게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다. 소년과 성인남성 사이에 있는 듯한 얼굴, 나약함과 강인함 사이에 있는 눈빛, 그리고 생존에 불리해 보이는 얇고 긴 몸. 그가 곧 <듄>이다. 젠데이아는 몇 장면 나오지도 않는데도 압도적이다. 그를 보고 있으면 배우는 연기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우가 가진 분위기 자체가 연기라는 생각이 든다.


(글) 손정빈

#듄 #티모시샬라메 #젠데이아 #드니빌뇌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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