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에 관해
연상호에게 지옥은 판타지가 아니다. 그에게 지옥은 현실이다. 세계는 언제 지옥이 되는가. 앞날을 알 수 없을 때,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다. 인간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할 때다. 그것은 갑자기 닥친 불행일 수 있고, 재난·재해일 수 있으며, 경제의 몰락일 수도 있다. 불확실하고 불가해한 일이 반복될 때 세계를 지탱하는 땅은 흔들린다. 해석되지 않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우리 삶을 뒤흔들고 있다는 불안이 곧 지옥이다. 그런데 이런 불안이 없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나. 그래서 현실은 곧 지옥이다. 이제 연상호는 묻는다. 이 무의미의 지옥 속에서 어떻게 살 거냐고.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은 연상호 필모그래피의 변곡점이다. 독립 애니메이션 영화 '돼지의 왕'(2011)과 '사이비'(2013)가 연상호 1기였다면, 상업 실사 영화 '부산행'(2016)과 '반도'(2020)는 2기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지옥'은 연상호 3기를 공표한다. '지옥'은 그가 플랫폼을 옮겨와 연출 방식에 변화를 줬다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연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보여준 이야기꾼으로서 재능, 실사 영화를 선보일 때 꽃피운 장르물 연출력(2기)을 조합해 OTT 드라마 시리즈에 이식했다. 다시 말해 '지옥'에서 그는 깊이와 재미를 동시에 손에 쥐고 6시간을 내달린다. '지옥'은 연상호의 최고작이다.
'지옥'엔 죽음 고지(告知)와 죽음 시연(試演)이 있다. 미지의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누군가에게 죽음을 예고하고, 예고한 날짜와 시간에 또 한 번 정체불명의 존재가 등장해 그 죽음을 행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 나타난 게 종교 집단 새진리회를 이끄는 정진수(유아인)다. 이 미스테리한 사람은 이 현상을 이렇게 해석하고, 주장한다. '죄 지은 자를 벌하는 신의 계시다. 죄 짓지 말고 더 정의로워져라.'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현상을 본 뒤 세상은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이 일은 어떤 과학, 어떤 이론으로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단죄일까. 이 불안을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이들은 이제 정진수의 말을 신봉하기 시작한다.
'지옥'은 구약성서의 '욥기'를, 이창동의 '밀양'을, 나홍진의 '곡성'을, 코언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크리스토퍼 놀런의 '다크나이트'를, 존 패트릭 샌리의 '다우트'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 작품 속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리고는 고통 속에 몸부림친다. 의심하고 화내고 절규하고 체념한다. 이들 작품 속 악당은 다른 게 아니라 불쑥 찾아와 우리를 흔들어 놓는 혼돈과 우연이다. 이 카오스에도 역시 의미는 없다. '지옥'의 고지와 시연 역시 어느날 갑자기 예고 없이, 어떤 기준도 없이 찾아온다. 이제 '지옥' 속 인간들은 이 무의미를 견뎌내기 위해 어떻게든 의미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연상호는 이 깊고 어두운 이야기를 장르물로 치환한다. 작가로서 연상호, 연출가로서 연상호의 장점이 조합되는 지점이다. 그 출발은 '불가해함'이라는 추상적인 말을 죽음 고지 및 시연, 지옥의 사신으로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고지는 최대한 갑작스럽게, 시연은 사신을 상징하는 크리쳐를 활용해 최대한 난폭하게 그린다. 그리고나서 새진리회(새로운 믿음)와 경찰·변호사(기존의 믿음), 자경단(혐오와 절멸), 피고지자(혼돈을 마주한 사람)를 구분해 대립시킨다. 고지와 시연의 급작성과 폭력성, 얽히고설킨 인물 구도가 맞물리며 긴장감이 유지된다. 주요 캐릭터를 과감히 퇴장시키며 1~3부와 4~6부를 구분한 결정도 인상적이다.
심각하기만 한 이야기, 유머 하나 없이 무겁기만 한 분위기, 과감하고 강도 높은 표현 수위, 다소 긴 분량 등을 볼 때 '지옥'은 OTT 플랫폼 외엔 담아낼 수 없는 작품이다. 만약 영상 콘텐츠 시장이 과거처럼 TV드라마와 영화 두 가지로 양분돼 있었다면 '지옥'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영상 콘텐츠 시장이 TV·OTT·극장·유튜브 등으로 세분화된 건 어쩌면 연상호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하는 데 최적의 기회가 됐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보여줄 게 많은 연상호를 가장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곳은 역시 넷플릭스 등 OTT로 보인다. 이제 연상호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만들고 드라마도 연출한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지옥'을 완성한다. 흥미로운 건 김현주·양익준·김도윤 등이 기존에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연기한다는 점이다. 김현주는 더 과감하고 단단하게 움직인다. 양익준은 감정을 삭힌다. 김도윤은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박정민과 원진아는 캐릭터가 약한 평범한 인물을 맡았음에도 존재감을 보여준다. 김신록 역시 쉽게 잊히지 않는 연기를 한다.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유아인이다. 그는 신비로우면서도 뒤틀린 내면을 가진 정진수라는 인물을 과장된 제스처 하나 없이 완성한다. 연상호·최규석의 캐릭터 조형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큰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정진수의 카리스마를 만들어낸 건 결국 유아인의 재능이다.
연상호는 단 한 번도 세상을 긍정한 적 없다. 그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이고, 어떤 면에서 보면 염세적이기까지 하다. '지옥'의 화법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무의미한 일들로 가득한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법도, 신앙도 아니다. 혐오와 배제와 절멸은 더욱 아니다.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의 해결책을 인간적인 것 바깥에서 찾을 순 없다. '지옥'은 결국 사랑과 연대를 말한다. 구태의연해 보여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연상호는 사랑과 연대가 현실이라는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준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최소한 이 지옥을 견뎌낼 수 있다고 말한다.
(글) 손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