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코리쉬 피자'는 어떤 영화인가
물론 영화 '리코리쉬 피자'를 어처구니 없는 유머와 희한한 캐릭터가 조합된 로맨틱 코미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불안하기만한 삶의 어느 시기를 보내고 있는 청춘의 성장담으로 봐도 된다. 혹은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샌퍼넌도밸리를 배경으로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누군가의 향수에 관한 얘기일 수도 있다. 어떻게 봐도 상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가 아닌가. 그렇게 간단할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 작품에 사랑·성장·향수를 모두 담아내면서 동시에 이런 것들과는 전혀 무관한 얘기 하나를 펼쳐보인다. 그렇다, 이건 정말 'PTA(Paul Thomas Anderson) 영화'다.
다시 말하지만 '리코리쉬 피자'는 로맨틱 코미디다. 절대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헤어져놓고도 자꾸만 생각나는 그 사람을 향해 돌아서서 또 한 번 힘껏 달려보는 그 끌림의 에너지가 이 영화엔 있다. 앤더슨 감독이 로맨스 연출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건 '펀치 드렁크 러브'나 '팬텀 스레드'로 확인됐다. 그 사랑의 형태와 방식이 평범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번엔 25세 여성 알라나(알라나 하임)와 15세 남성 개리(쿠퍼 호프먼)의 얘기.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하게 작업을 걸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엔 소년의 순수한 사랑 같은 건 없고, 대신 성적 긴장감이 가득하다. 이건 어쩌면 PTA식 로맨스 연출법이다.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개리와 알라나가 아무리 떨어지려고 해도 끝내 서로를 잡아당기고 있다는 사실이니까 말이다.
좋은 로맨스는 곧 성장을 뜻하기도 한다. 알라나와 개리의 관계도 그렇다. 알라나는 개리를 알게 된 뒤 욕망에 눈뜬다. 학교 졸업앨범 사진사의 보조로 일하며 은근한 권태와 억압 속에 있던 알라나는 10살 어린 개리와 연애하고, 아역배우인 그의 촬영장에 동행하는 일탈을 한 후 삶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리코리쉬 피자'는 어떻게 보면 알라나가 개리를 포함한 몇 명의 남자를 만나는 얘기다. 그는 개리와 남자들을 알게 되고 만나면서 전에 본 적 없는 세상을 마주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개리는 알라나와 만남 이후 비즈니스를 시작하고 사업가가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성장과 로맨스, 일과 사랑을 오가며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앤더슨 감독은 이 청춘 스토리를 1970년대를 배경으로 담아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리코리쉬 피자'라는 제목은 1970년대 남부 캘리포니아에 있던 레코드샵 이름에서 따왔다. 그 지역 산퍼넌도밸리가 고향인 앤더슨 감독은 "'리코리쉬 피자'를 생각하면 유년 시절이었던 1970년대가 자동으로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니까 영화 제목 자체가 '1970년대'라는 것이다. 영화의 질감 역시 당시 느낌을 내기 위해 1973년에 나온 조지 루카스 감독의 '청춘 낙서'를 참고했다. 또 데이비드 보위, 도어스 등이 내놓은 당대 명곡으로 OST를 채웠다. 앤더슨 감독은 '팬텀 스레드' '마스터' '데어 윌 비 블러드' '부기 나이트' 등에서 이미 영화 안에 과거 특정 시점의 분위기와 공기를 구현하는 데 특출난 재주를 보여줬다.
그런데 이게 다인가.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마스터'(2012) '인히어런트 바이스'(2014) '팬텀 스레드'(2017) 등 내놓는 작품마다 뛰어난 완성도와 작품성으로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줬고,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얼음 같이 차갑다가도 화산처럼 폭발해버리는 화법을 10여년 간 이어왔으며, 역사와 사회에 대한 날선 시각을 보여주기까지 한 예술가가 왜 갑자기 이런 천진난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던질 관객에겐 일단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만약 '리코리쉬 피자'를 사랑·성장·향수라는 키워드로만 본다면 이건 이 작품을 절반 밖에 즐기지 못한 거라고. 어쩌면 이 영화는 사랑·성장·향수 따위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이다.
'리코리쉬 피자'는 우리가 이른바 'PTA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로 부르는 것들을 차례로 탄핵하면서 결국 가장 PTA스러운 영화로 나아간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캐릭터 측면에서 볼 때, 정신적으로 황폐하거나 내면 어딘가가 뒤틀린 주인공이 없다. 주요 인물의 관계성이라는 면에서 봤을 때는, 유사 부자(父子) 관계가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영화는 과거 특정 시기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으면서도 앤더슨 감독 작품에서 자주 발견되는 미국 현대사에 대한 특유의 코멘트도 보이지 않는다. 이건 다분히 의도적인 설정이며, 이것이 앤더슨 감독이 '리코리쉬 피자'를 만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앤더슨 감독은 '리코리쉬 피자'로 자신이 만든 영화와 그 영화 속 캐릭터를 비웃는다. PTA 영화는 그간 석유·자본·종교·전쟁·폭력 등 키워드로 미국 사회를 이해했고, 이를 이건·플레인뷰·선데이·퀠·랭케스터·닥·빅풋 등 캐릭터로 상징했다. '리코리쉬 피자'엔 이들 캐릭터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알라나는 이들을 만났다가 실망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영화가 알라나와 개리의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여성인 알라나의 시선으로 진행된다는 건 중요하다. 어떤 트라우마도, PTSD도 없는 젊은 여성이 보기에 시대의 변곡점을 지나왔다는 그 남성들은 지나치게 자기연민에 취해 있거나 유난스럽게 위악적이기만 해서 한심하고 유치한 존재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리코리쉬 피자'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대목인 존 피터스(브래들리 쿠퍼)와의 만남과 석유 파동 에피소드는 오히려 의미심장하다. 알라나가 운전하고 개리와 친구들이 함께 탄 트럭이 언덕 위를 올라가다가 기름이 떨어져 멈추자 알라나가 능숙한 '무동력 후진'으로 차를 몰아 주유소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하는 시퀀스는 이 영화로 앤더슨 감독이 말하려는 걸 집약한 장면으로 보인다. 석유통을 든 개리와 친구들이 자위하듯 장난치는 모습과 길거리에서 난데없이 폭력성 드러내다가 다가오는 여성에게 작업을 거는 피터스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쉬는 알라나의 표정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알라나만 PTA 영화의 유산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개리도 마찬가지다. 그가 15세라는 설정은 재미를 위한 장치가 아니다. 개리가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는 미성년자라는 건 그가 어떤 개인적·역사적 고통이나 아픔도 짊어지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남성이라는 의미다. 개리에게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만 있는 것처럼 나오는 것 역시 PTA 영화 특유의 유사 부자 관계를 의도적으로 제거해 이 소년에겐 어떤 시대적 유산도 상속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개리는 그저 연애가 하고 싶고 돈이 벌고 싶은 건강한 남성이다. 알라나의 눈엔 개리 역시 한심한 남자 중 하나인 건 다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가 결국 개리에게 돌아가는 건 최소한 자기연민이나 위악이 없고, 트라우마나 PTSD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리 역을 앞서 PTA 영화의 페르소나였던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의 아들 쿠퍼 호프먼에게 맡긴 건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리코리쉬 피자'엔 PTA 영화 특유의 시대성도 제거돼 있다. 만약 앤더슨 감독이 지난 작품들의 방식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1970년대가 배경인 이 극 속엔 베트남 전쟁이나 히피 문화, LSD 등에 관한 언급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코리쉬 피자'는 그런 시대상을 일부러 외면한다. 대신 1970년대의 평범한 일상의 분위기를 충실히 재연하는 데 골몰한다. 흔히 영화에서 말하는 향수라는 걸 사회적 함의가 담긴 역사가 아닌 개인적인 차원의 에피소드 정도로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또 한 번 앤더슨 감독은 이른바 'PTA 영화'를 스스로 배신한다. 시대와 역사 같은 건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앤더슨 감독은 '리코리쉬 피자'를 통해 그간 자신이 만들어온 영화를 점검하는 것만 같다. 그를 세계 최고의 영화감독이자 작가로 주저 없이 부를 수 있는 건 그동안 자신이 구축해온 세계를 이처럼 검토하며 뒤돌아 볼 수 있고 그 과정 역시 영화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리노의 도박사'에서 '펀치 드렁크 러브'까지가 PTA 영화의 1기, '데어 윌 비 블러드'부터 '팬텀 스레드'까지가 2기였다면, '리코리쉬 피자' 이후에 나올 영화들은 아마도 PTA 영화 3기가 될 것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정말 폴 토머스 앤더슨처럼 앞으로 새롭게 이어질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리코리쉬 피자'로 예고하고 있다.
'리코리쉬 피자'가 그동안 꾸준히 PTA 영화와 함께해온 영화 마니아들에게 훨씬 더 친절할 수밖에 없는 영화인 건 사실이다. 그래서 앤더슨 감독은 '리코리쉬 피자'를 이렇게 겉과 속이 완벽하게 다른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영화로 만들어놨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사랑·성장·향수에 관한 얘기로 봐도 된다. 동시에 그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영화로 봐도 된다. 잘 만든 영화가 어떤 것인지, 영화를 잘 만든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앤더슨 감독은 다시 한 번 영화를 보는 재미를 관객에게 선사하고 있다.
(글) 손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