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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와 잭슨 폴락

마이웨이를 고집한, 괴팍한 선구자의 초상

네덜란드 축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슈퍼스타인 요한 크루이프,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잭슨 폴락은 묘하게 닮아 있다. 당대 최고로 인정받았을 정도의 뛰어난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다소 괴팍한 성격까지도 비슷하다. 여기에 더하여, 이들은 주변의 시선을 거부한 채 마이 웨이를 고집한 선구자였다. 포장지를 꺼내서 얘기하자면 후배들을 위한 길을 터주기 위해 선구자의 길을 택했을 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마이 웨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은 기존의 관념과 질서에 반하는 안티 테제를 들고 나왔다. 남들이 하지 않는 퍼포먼스, 쉽게 따라할 수 없는 동작만으로도 그들의 마이 웨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기존 사회로부터 답습된 가르침을 거부한 마이 웨이는 당대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때로는 반발심을 불러일으키지만, 후대를 위한 교과서가 된다. 물론 그 마이 웨이는 대체로 고통스럽지만.



아약스 시절 리누엘 미헬스 감독과 크루이프가 합작한 토털 사커는 시류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물론 미헬스 감독의 아약스 시절 이전에도 토털 사커 개념은 존재했다. 1950년대의 '마자르 군단' 헝가리가 포지션 스위칭 개념으로 보여준 화려한 공격을 선사한 바 있고, 동 시대에 독일이 프란츠 베켄바워를 중심으로 공격적 수비 기반의 토털 사커를 보였다. 하지만 토털 사커를 현대적 개념으로 한 단계 진화시켜서 축구의 개념을 통째로 바꿔놓은 것은 크루이프였다.


공을 뺏겨서 수비할 때에도 ‘공격’을 염두 하면서 수비한다. 하프라인 근처로 후퇴하여 자리를 지키는 기존의 개념에서 탈피하여, 끊임없는 전진과 압박으로 상대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 것이 토털 사커의 핵심이다. 수비수는 상대 공격수를 막는 것이 아니라, 상대 공격수를 공격한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한 공격적인 게임 플랜으로 90분 내내 주도권을 쥐어야, 경기에서 이길 확률을 높일 수 있다.



공격을 멈추지 않는 야성, 타고난 넓은 시야로 필드 위에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크루이프의 모습은 잭슨 폴락에게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멕시코의 벽화 화가인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의 작업실에서 페인트를 들이붓고는 것이 예술적 기법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  폴락은 본인의 작업실에 커다란 캔버스를 깔고 페인트를 거침없이 붓고 떨어뜨렸다. 이른바, 드리핑 (Dripping) 기법의 탄생이었다. 페인트만 떨어뜨린 게 아니라 에나멜페인트, 심지어 모래와 유리까지 부어버렸다. 


전통적 해석을 거부하고 우연을 연출했던 폴락에게 당대의 시선은 전혀 곱지 않았다. 그가 미술계를 난도질한다는 비난의 의미를 담아, '잭 더 드리퍼 (Jack the Dripper)'라는 제목의 기고문이 실리기도 했다. 회화의 전통을 거부하고 초현실주의에서 한 단계 나아가 캔버스 위를 카오스의 압축판으로 만들어버린 폴락은 기성 사회의 입장에서 난신 적자와도 같았다. 물론 일부 화가들은 현세 최고의 화가라고 칭송했지만, 대다수의 시선은 냉소와 비난이었다.



더구나 폴락은 학력이 매뉴얼 아츠 고등학교 중퇴가 전부인 데다가, 학창 시절에 드로잉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고 하니, 당대 미국의 미술 주류의 눈에는 드로잉도 못하는 놈이 아까운 물감만 낭비했다고밖에 보이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그의 야성은 멈추지 않았고, 거칠고 파격적인 그림도 1950년대에 지속적으로 배출됐다. 당대 미술계와의 충돌도 피하지 않은 채 한 폭의 카오스를 보여주었으니, 그것은 본인의 파격적인 시도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다.


폴락은 "나는 우연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연을 부정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얼핏 보면 아무런 방법론도 보이지 않는 카오스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감의 농도나 색에도 규칙이 있다. 그렇게 물감을 들이붓는 와중에도 캔버스 곳곳을 꽉 채웠다. 그러한 연출은 폴락이 처음부터 계산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자신의 연출이 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심지가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향하는 축구에 대한 크루이프의 믿음 또한 강렬했다. 크루이프는 정기적인 훈련을 죽도록 싫어하고 팀연습도 제대로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경기 중에도 하프타임만 되면 줄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획일적 훈련이 선수를 죽인다는 믿음이 강했고, 훗날 FC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한 후에도 일일이 선수를 관리하는 훈련보다 자율적 연습을 강조했다. 그에게 규칙적인 훈련은 아무 의미 없는 뜀박질에 불과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크루이프는 기존의 유럽 축구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을 추구했다. 1988년에 FC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FC 바르셀로나 임원진과 함께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이다. 글로벌 기업과 갑부들이 자본력으로 유럽의 축구 클럽들을 매입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는 데에 환멸을 느끼고, 어린 선수들이 함께 공부하고 기술을 연마하면서 성장하는 축구 문화를 바탕으로 한 유소년 육성 체제를 만들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라 마시아'이며, 오늘날 리오넬 메시를 탄생시킨 토양이기도 하다.


그러한 신념 탓인지, 그들의 직업 밖 삶은 다소 위험천만했다. 마이 웨이를 쉽게 받아주지 않는 세상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크루이프는 자신의 신념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하며 수많은 안티를 양산했다. 크루이프는 "유기적 과정 없이 승리만 거두느니, 이기지 않는 게 낫다."라는 발언을 한 것은 물론, 현대 축구가 기술적으로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는 날선 비판으로 언쟁을 멈추지 않았다. 수비와 역습으로 이기는 축구에 대한 악담, 일명 '안티 풋볼' 발언이다. 이러한 발언 때문에 자국인 네덜란드 축구계와도 여러 번 부딪혔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의 폴락의 삶은 술과 폭력으로 얼룩졌다.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물론 그런 증상들이 그의 추상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쳤다고는 하나, 어린 시절의 가난과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인한 후유증은 폴락의 삶을 갉아먹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 무엇을 할 지 몰라서 술과 폭력, 여성 편력으로 자신을 흑화시켰다. 그나마 폴락의 멘탈을 잡아줬던 아내마저 그의 곁을 떠난 직후에, 폴락은 거짓말같이 도로 위에서 음주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마이 웨이를 세상이 받아주지 않을 때의 마음의 상처는 큰 법이다. 그것을 어떠한 형태로든 분출해야만, 두 다리를 땅에 딛고 살 수 있었으리라. 크루이프는 독설과 담배로 분노를 표출했고, 폴락은 술과 반사회적 행동으로 버텨야 했다. 그들 모두 이 세상에 없고, 그들의 상처를 받아줄 이가 더 많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영광과 고통을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짊어지고 먼저 앞서나간 이들에 대한 세상의 찬사가 더욱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선구자는 대체로 외롭고 고통스러운 명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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