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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사회 고찰해 보기

우리가 모르는 미국 흑인 사회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미국은 물론 전세계 곳곳에서 들불처럼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열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아무런 감흥이 오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들도 차별받는다는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결정적으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은 미국 흑인 사회에 대한 맥락을 전혀 모른다. 계몽의 차원에서라도, 그들에 대한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 미국 흑인 사회는 왜 이 상태인지.


멀어져 가는 교육


NBA의 살아있는 전설, 카림 압둘-자바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 학교 성적이 좋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구들에게 구타당했다고 서술했다. 백인의 교육을 받은 배신자, 백인 놈들에게 굴복한 비겁자라며 맞았다고 한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흑인 친구들 입장에서, 압둘-자바는 형제들을 뿌리치고 혼자서 혜택을 독차지한 놈인 셈이다.


그런데 이는 압둘-자바만 겪은 고통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하나같이 내뱉는 어린 시절의 안 좋은 기억이다. 중고등학교에서 좋은 성적 받아서 명문 대학을 장학금 받으며 다니는 순간, 유년기 시절 흑인 사회와 손절한다. 멀쩡하게 집에서 학교에 잘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신자 낙인을 찍는 경우가 허다하다.


압둘-자바의 유년 시절 기억은 영 좋지 않다


백인과 흑인 간의 인종 갈등이 지속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교육이다. 미국 내에서 빈민층 비율이 높은 흑인들은 미국의 제도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으며, 흑인들 사이에서 교육은 그저 백인을 포함한 일부 상류층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게다가 아이비리그를 포함하여 교육 수준이 높은 사립 학교는 학비도 비싸니, 등록금 납부할 엄두도 못 내는 흑인들에게는 우주 저 편 얘기다. 그러니 백인 교육 받는 흑인은 그들만의 테두리를 뛰쳐 나간 배신자가 된다. 


마틴 루터 킹을 포함한 흑인 인권 운동가들이 고민을 기울인 것도 교육이었다. 교육 사각지대의 흑인들이 교육 혜택을 받아야 인종 차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미국은 지난 수십 년동안 인종 간 교육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흑인 인권 운동가들의 의도와 달리, 흑인들의 교육 수준은 높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백인 사회와 더 멀어진다고 봐도 되겠다. 더구나 아시아계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계속 올라가는 중인데, 이게 흑인들의 아시아인에 대한 열등감의 원인이 된다.


실제로 미국에서 4학년, 8학년 학생들 대상으로 매년 치르는 전국 학업성취평가 (NAEP) 성적을 살펴보면 흑인 및 히스패닉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제자리걸음 상태다. 2019년 기준으로 볼 때, 수학 성적 격차는 역대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흑인 학생들의 수학 학습 능력이 매우 떨어져 있다. 그 정도로 백인이나 아시아 학생들과의 학업 격차는 20년이 넘도록 줄어들지 않는다.


위에서 얘기한 배신자 마인드가 여기에 한몫 한다. 학교에 안 가고 돈도 못 벌지언정 백인 사회에 절대 흡수될 수 없다는, 일종의 선 긋기다. 학비가 없을 정도로 가정 형편이 좋지 못해서 교육이 친숙하지도 않지만, 설사 기회가 오더라도 스스로 거부한다. 백인들이 만들어낸 제도권의 교육을 멀리 하며 길거리를 배회하는 Thug life가 정체성이라고 여긴다.


힙합 대중화의 자충수


이렇게 흑인들이 제도권의 교육과 계속 멀어지는 데 방아쇠 역할을 한 것이 힙합이었다. 그 중에서 갱스터 힙합은 빈민가 흑인들의 거친 삶, 메시지를 내보내는 창구였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흑인 사회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다. 


1960~70년대부터 미국 뒷골목의 흑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랩 문화는 80년대 들어 힙합이라는 음악 장르를 만들어냈다. 그 중에서 적나라한 가사와 거친 딜리버리, 강력한 비트로 구성된 갱스터 힙합이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 대중 음악계를 강타한다.


미국 동부는 Biggie Small, Big Daddy Kane, Wu Tang Clan 등을 중심으로 갱스터 힙합이 퍼져 갔고, 미국 서부에서는 N.W.A, 2Pac, Cypress Hill 등의 랩이 캘리포니아 흑인들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2Pac과 Biggie 간의 갈등으로 90년대 올드 스쿨 힙합이 인기를 얻기 전에도 미국의 힙합은 이미 일종의 문화로 굳어져 있었다.


닥터 드레 (우), 아이스 큐브 (좌)


이들의 랩은 백인 기득권 사회를 거침없이 겨냥하여 욕한 것은 물론, 가난에 찌들고 피폐하고 타락한 일상 생활마저 숨김없이 드러냈다. 술과 마약, 섹스가 마치 큰 돈을 벌어서 성공한 흑인 남성의 상징이 됐고 흑인 사회 사이에서 마초적인 남성상을 자극했다. 갱스터 랩의 가사에서 비싼 차와 돈, 마약 얘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힙합 뮤지션들이 통과의례처럼 입는 통이 큰 바지와 후드 티는 미국 흑인들의 의류 문화 정체성에 못을 박았다. 유현준 교수의 저서 <어디서 살 것인가> 를 보면, 주거지와 생활이 불안한 흑인들의 자기 보호 본능에서 확산된 옷이 후드 티라고 나와 있다. 힙합 뮤지션들은 여느 흑인들이 입는 옷을 입고 마이크를 들면서, 흑인들 간의 유대감을 결집시켰다.


여기까지만 보면 힙합의 대중화가 흑인 사회의 문화 융성에 기여한 듯 보인다. 그러나 흑인 사회 전반으로 보면 힙합의 대중화는 오히려 자신들의 발목을 잡는 자충수가 됐다. 위에서 흑인과 백인 간의 교육 격차가 갈수록 심해졌다고 했는데, 힙합의 대중화가 이러한 격차 심화에 기름을 부었기 때문이다.


힙합이 90년대 이후 미국 팝 음악의 주류로 떠오르자, 흑인들은 더더욱 백인들과 선을 긋고 사회적 혜택을 스스로 거부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범생을 자기 얘기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샌님 (Nerd) 취급한다. 성적으로 문란하고 거친 갱스터, 교육 따위 개나 주고 개썅 마이웨이로 사는 마초남이 우상화됐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이가 찐따가 되는 패러독스다.


힙합 대중화로 확대된 흑인들의 마초이즘은 흑인들의 잘못된 사회적 관념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의 갱스터 랩에는 여성을 성적 도구로 여기는 가사가 많고, 돈을 있는대로 뿌려대는 사치와 향락을 포장하는 가사들도 많다. 교육 수준이 낮았던 흑인들이 이 가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의식의 발전도 멈췄다. 


현실을 까놓고 보자. 흑인들이 대중 문화의 영웅으로 리스펙하고 칭송하던 뮤지션들의 말로는 대부분 비극이다. 과거 N.W.A의 멤버였던 Eazy-E는 문란한 성생활로 인한 성병으로 일찍 생을 마감했고, 2Pac과 Biggie는 거리에서 괴한에게 총살당했다. 최근에는 주스 월드가 약물 과다 복용의 부작용으로 사망했다. 어쩌면 이들의 비극적 최후는 예견된 것일 지도 모르겠다.


힙합은 분명 흑인들을 위한 표현의 수단이자 문화적 상징이다. 음악의 역사에 기여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힙합 대중화는 흑인 사회의 인식 발전을 막았고, 흑인 사회는 그렇게 미국에서 점점 뒤처졌다. 이런 점을 의식했는 지, 과거의 힙합 뮤지션들은 요즘 갱스터 랩을 지양하고 있다. 스눕 독 역시 본인 곡의 가사가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 알고 나서, 예전의 적나라한 가사와 딜리버리를 끊었다. 가족 중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마친 사람이 대부분이라, 뭐가 옳고 그른지를 전혀 판단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열등감, 그리고 이질감


이처럼 사회적으로 계속 뒤처지는 흑인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은 다름아닌 미국의 아시아인들이었다. 한국인들은 흑인들이 아시아계 사람들을 차별한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얘기하자면 열등감이다. 그 열등감으로 인해 흑인 사회가 백인 계층은 물론 다른 계통의 민족과도 멀어졌다.


조지 플로이드 시위뿐만 아니라, 과거 퍼거슨 시위의 발생 순간에도 국내 포털의 반응은 같았다. 흑인들도 결국은 아시아인들을 차별하니까 저들의 시위에 공감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국내에선 흑인이 살아온 맥락을 거의 모르니 이들의 감정을 알 리 없다다. 정확히 얘기하면, 이주민 집단과 제대로 섞여본 적이 없어서 다민족 사회의 삶이 무엇인 지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런 비유는 어떨까? 1960~70년대 한국에서 경제 개발이 이뤄질 때 베트남이나 말레이시아의 사람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서 한남동, 강남 등 비싼 땅을 연이어 사들이고 명문 대학에 자리 잡고, 대기업의 요직에 앉아서 한국 사회의 주류로 자리잡았다면? 그 때문에 대대로 살아오던 한국인들이 주류에서 밀려난다면? 



미국 흑인들 입장에서 아시아인들이 그런 존재였다.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자리잡은 아시아인들이 어느새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버젓이 들어가고, 흑인들은 들어갈 엄두도 못내던 샌프란시스코 일대의 비싼 땅에 입주하고, 백인 상류층과 어울리는 모습에 열등감을 느낀 게다. 흑인들 눈에는 체구도 작고 별 거 아닌 것 같은 아시아인들이 무섭게 자리 잡고 있는 게 달갑지 않은 현상일 테다. 


1992년 LA 폭동은 그런 열등감이 폭발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미 언론의 장난질이 한몫을 했지만, 알게 모르게 쌓여왔던 흑인들의 열등감으로 인해 폭발한 불똥이 한인 사회로 튄 것이다. 한국인들은 흑인들의 행동을 차별이라고 생각하지만, 맥락을 고려해보면 열등감이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아시아인과 흑인 간의 학업 수준 차이가 꽤 많이 벌어져 있다. 게다가 미국이 20세기 중반 메트로폴리탄 지역 재개발을 진행할 때, 새로운 주거 구역에 백인들을 우선으로 받아들이고 흑인들을 은근히 배척해왔다. 그 재개발 구역에 아시아인들이 발을 들이면서 주거 환경 차이도 커졌다. 신도시 땅에 가지 못한 흑인들은 그대로 슬럼가에 남았으니까. 


반대로 아시아인들 입장에서 미국의 흑인들은 이질적 존재였다. 18~19세기에 선교사들이 성경이나 영어 교재로 보여주던, 학교에서 교과서로 보던 미국인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영어도 교과서 속 영어가 아닌 그들만의 Ebonics 투성이고, 생활 방식도 교과서 속 John, Jane과 너무 다르다.


이역 만리 땅에서의 성공, 빈곤 탈출을 위해 아시아인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스스로에 익숙한 환경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레 흑인 사회와 멀어져 갔다. 조금이라도 더 세련되고 교육 친화적인 곳을 찾으며 생긴 결과다. 생활 환경이 멀어지니, 공감을 위한 시공간이 부족할 수밖에.


서로에 열등감을 느끼고 이질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서로의 역사 및 문화적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직접 부딪히고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나지 않는 이상, 인종 차별적 사고를 없애기는 더 힘들다. 억지로라도 상대의 발자국과 맥락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생경한 시공간을 걷어내는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다.


결국 그 시간을 위한 해결 방안은 교육에 있다. 더욱 전인적이고 포용적인 교육과 소통이 기본이다. 한 발 나아가, 여전히 곳곳에 만연한 인종 차별 사고와 인종 간의 충돌을 줄여나갈 수 있는 실질적 해법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시적인 물리적 충돌과 집단 행동에서 한 단계 나아가야 한다. 그 고민의 주체는 인종을 초월한 모든 인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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