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의 끝없는 싸움
1970년 2월 25일, 영국 런던에 위치한 테이트 갤러리에 마크 로스코의 작품 9점이 도착했다. 그의 작품이 테이트 갤러리에 도착하기 몇 시간 전, 로스코의 시신이 그의 작업실에서 발견되었다. 사인은 자살이었으며, 생전에 참여했던 시그램 프로젝트 작품이 테이트 갤러리에서 영구 전시되기 직전에 목숨을 끊은 것이다. 추상표현주의 화풍의 대표 주자인 로스코의 최후는 비극이었다.
그로부터 24년 후인 1994년 4월 5일, 너바나의 보컬 커트 코베인이 유서를 남긴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당대 최고의 락 밴드 너바나의 보컬로 이름을 날렸지만 오랫동안 앓았던 조울증, 가정사의 비극으로 생긴 상처로 인해 불과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1991년에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세상을 떠난 지 겨우 2년 반만에 커트 코베인이 자살하면서 브리티시 락 음악계는 충격에 빠졌다. 너바나가 사실상 브리티시 락의 마지막 주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베인이 남긴 유서를 보면 코베인이 거듭했던 근본적 고민이 담겨 있었다. 놀라운 것은 마크 로스코 역시 비슷한 고민을 안은 채로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
"너무도 오랫동안, 읽고 쓰고 음악을 만들 때의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이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가끔 나는 무대에 올라갈 때 출근 도장을 찍는 기분이었다. 나는 기분이 금방 바뀌는 어린아이이며, 더는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이 기억해주기 바란다.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보다 한순간에 타는 것이 낫다는 것을."
너바나의 명곡 <Smells Like Teen Spirit>으로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지만, 코베인은 그 한 곡으로만 기억되는 것을 싫어했다. 게다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이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아티스트로서의 고민이 쌓이면서, 코베인은 음악에 대한 흥미와 감동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 한 번쯤은 거치는 권태기였을까, 아니면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에서의 표류였을까.
추상표현주의 선구자로도 꼽히는 마크 로스코의 인생관도 비슷했다. 러시아 이민자 출신인 로스코는 예일 대학교 중퇴 후 뉴욕 파슨스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1930년대부터 이미 예술가 그룹 '텐'의 일원으로 전시회에 작품을 올리며 예술가의 커리어를 쌓고 있었지만, 1950년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의 단독 전시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포춘> 잡지에서 그의 그림이 미술 투자 작품 중 하나로 실릴 정도로 명성을 얻으며, 로스코는 잭슨 폴락 등과 더불어 추상표현주의파의 대표 주자로 불렸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를 혐오했던 사람이었다. 하루 식비가 5달러가 넘어가면 범죄라고 말할 정도였다. 1954년에 시그램 빌딩이 자랑하는 초호화 레스토랑 포시즌스에 전시될 그림을 그리는 시그램 프로젝트에 참여한 목적이 '식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식욕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고 하니, 돈으로 굴러가는 사회에 대한 그의 혐오 감정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 로스코의 시그램 프로젝트 참여 계약금은 35,000달러, 현재 원화 가치로 무려 25억원이다.)
가난한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나서, 학비 때문에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도 자퇴해야 했던 로스코였지만, 그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에 충실하는 예술이 돈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었다. 196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단독 회고전을 열 정도로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그 와중에도 당시 미국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팝 아티스트들에 대한 맹비난을 잊지 않았다. 앤디 워홀, 제임스 로젠퀴스트 등을 사기꾼,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으며 팝 아트 전시장에서 "팝 아트가 예술 전체를 죽이고 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예술가 자신의 감정, 인간의 본질에 충실하기 위한 예술성, 돈을 벌기 위해 대중의 취향과 맞춰가는 상업성은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충돌했다. 본질과 소통, 뚝심과 타협 등 여러 가치가 동시에 충돌하게 됐고, 그러한 투쟁 속에서 예술성과 상업성이 미친듯이 뒤섞이다가 사람 머리 아프게 만드는 패러독스가 탄생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락의 패러독스였다.
대중의 취향에만 맞춘, 돈이 없으면 못하는 기존 음악에 대항하며 20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음악이 락이다. 하지만, 락 뮤지션들이 부와 명예를 얻으며 어느 새 락 뮤지션들도 기득권이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항하고자, 1970년대에 'Anyone can do it'을 표방하며 나타난 섹스 피스톨스를 포함하여 펑크 락, 프로그레시브 락 등의 변형 장르가 등장했다. 음악의 평등성, 시대를 꿰뚫는 예술성과 저항 정신을 다시 강조한 셈이다. 그러나 락의 패러독스가 끊기지는 않았고, 커트 코베인의 시대까지도 패러독스는 이어졌다.
로스코는 어쩌면 그러한 패러독스에서 최대한 자유롭고 싶었을 게다. 철학적으로는 실존주의를 포함한 포스트모더니즘 광풍이 불고, 예술적으로는 급격한 장르의 다변화가 발생했던 1950~60년대에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와 명예를 가질 수 있었다. 존 레넌처럼 히피즘을 표방하여 저항의 예술을 할 수도 있었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처럼 대중을 들썩이는 작품을 만들 수도 있었다. 약간의 타협만 있었다면 상업적인 추상주의 작품이 나왔겠지만, 로스코는 고민을 끊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예술가의 삶에서,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의 끝없는 싸움은 숙명일 지도 모르겠다. 귀를 막고 본인의 길을 고집할 수도 있고, 대중과의 소통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고, 매번 하나만 택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방향을 쫓든 간에 예술 작품은 사람을 향한다는 것이며, 그 길의 테마는 명확하게 단정지을 수 없다는 점이다. 로스코가 자신의 작품 이름을 무제라 칭한 것도, 인간의 감정을 대변하는 색깔 자체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