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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예체능 장벽의 비극

폐쇄가 자초한 부패

다시 브런치를 켰는데, 좋은 소리를 하기는 힘들 것 같다. 하긴, 요즘 세상에 좋은 얘기가 나오기는 쉽지 않다. 폭우를 포함한 이상 기후는 계속되고, 전쟁의 위험은 자꾸만 커지고. 한국에서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사건이 터진다. 한 줄기 희망을 찾는 긍정의 회로를 돌리기엔, 나의 뇌가 지친 게 아닌가 싶다.


쓸데없는 감정 분출일 수도 있고, 개똥 철학을 내뱉을 수도 있겠다. 다만,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기에 써본다. 모든 주제를 일일이 글에 담아내기는 과하고, 최근 한국의 가요계를 들쑤셔놓은 표절 논란에서 화두를 시작한다. 


가요계의 표절, 오래 전부터 가요계의 독버섯처럼 자리 잡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국의 대중 가요는 표절을 먹고 자랐다고 해야 할까. 미국의 음악, 일본의 음악을 조각조각 단위로 베끼면서 창조 흉내를 냈기 때문이다. 한국만의 대중 음악 기반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모작 (남의 작품을 연습삼아 그대로 본뜨는 행위) 단위로 출발했다가 위작의 단계까지 이른 셈이다. 


표절이 아닌 오마주라고 변명하지만...


80~90년대 한국 가요계는 표절에 점점 중독된다. 남들은 90년대 한국의 대중 음악을 K팝의 전성기처럼 표현하지만, 나는 이 시절을 추악한 밀실 관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폐쇄된 대중 음악계의 불편한 진실이 함께 했던 시대였다. 폐쇄된 업계의 밀거래, 그리고 정보의 비대칭이 표절의 범람을 만들어냈다.


그 시절의 가수 매니저들은 틈만 나면 부산으로 갔다고 한다. 일본의 대중 문화가 개방되지 않았던 당시에, 일본의 J팝 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창구가 부산이었다. 아니면 명동의 시장 바닥으로 일부 흘러 들어오거나. 어쨌든 부산의 롤러장, 나이트 클럽에 가면 곤도 마사히코나 소년대의 댄스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시대가 90년대였다.


일본의 명곡 음원들을 한 소절이라도 집어가는 것이 매니저들 사이의 밀실 경쟁이었다. 멜로디 몇 개만 적당히 짜깁기해도 새로운 히트곡을 뽑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당시의 수도권 사람들과 TV 시청자들은 일본 노래를 잘 모르던 시대니, 표절 시비가 일어날 가능성도 극히 낮았다. 음악 청취자와 음악 제작자 사이에 엄청난 장벽이 있어서 생긴 일이다.


그뿐인가. 유럽 클럽 음악의 멜로디 일부분만을 그대로 가져와서 새로운 댄스곡이라 버젓이 발표한 시대였다. 미국의 힙합 명곡의 멜로디 라인과 비트를 그대로 베껴 만들면, 한국형 블랙 뮤직의 시초라고 불렸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도 한국의 힙합을 힙합이라 인정할 수가 없다. 한국적 맥락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한국형 블랙 뮤직인지, 지나가던 개도 안 웃겠다.


90년대 히트곡 중에서 표절 논란이 없는 곡의 비중이 얼마나 될까? 정보의 양이 공급자 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었던 시대라서 음악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소비자가 많지 않던 시대였지만, 베끼기 경쟁에서 탄생한 곡을 본인의 역작인 것처럼 떠드는 시대가 정상일 리 없다. 되려 베끼기 경쟁에서 패한 가수나 작곡가가 바보 취급 받는 시대였고.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베끼기 경쟁에서 승리하면 용서받았다.


9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의 명곡들이 진짜로 노래를 잘 만들어서 명곡이 아니다. 이미 알려진 명곡의 코드들과 멜로디를 베껴 편집했으니 명곡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까놓고, 해외에서 대박났던 히트곡을 그대로 베꼈는데 인기가 없을 수가 있나?


K팝의 그림자와 같은 표절 문제는 몇몇 가수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다. 폐쇄된 한국 대중 음악계의 암세포와 같다. 그들만의 장벽 안에서 누구도 암세포를 떼어낼 생각을 하지 않아, 이제는 작곡가들이 암세포에 전염된 상태로 작곡을 한다. 외부의 피드백도 없고 업자들끼리의 폐쇄된 담합에 매달려 있으니,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왔다.


이러한 표절 행태의 기저에는 대한민국 예체능을 관통하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 바로 폐쇄된 장벽의 존재다. 장벽 안에서 업계 사람들끼리만 장사하고 논다. 일반 기업들을 보면 주식 시장이나 취업 정보, 뉴스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정보는 공개되어 있다. 소매 업체나 요식업체들은 소비자들의 피드백에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한다. 정보가 일정 부분 공개된 시장에 있다 보니, 기업의 계속 영업을 위해서라도 쇄신의 흉내는 낸다.


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하는 장치가 있어야 정상 아닐까


하지만 예체능계는 제대로 공개된 정보가 별로 없다. 이를테면 인력 채용에서 공개 경쟁은 처음부터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만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을 테니까. 더구나 장벽 뒤에서 무슨 거래를 하는 지, 소비자들의 입장에서는 알기 어렵다. 


위에서 얘기한 대중 음악계의 표절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농구나 배구처럼 드래프트 제도를 시행하는 스포츠도 이러한 밀실 정치가 심하다. 드래프트 전부터 엄청난 뒷거래가 펼쳐진다. 중고등학교 감독, 대학 감독, 프로 구단 감독 및 프런트, 선수의 학부모 간의 눈치 싸움과 뒷거래는 이미 일상이 됐다. 사실상 공개 경쟁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왔다.


실제로 한국의 KBL이나 V리그의 드래프트를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선수 지명이 매번 발생한다. 전혀 프로에 갈 실력이 아닌 선수가 지명받는가 하면, 지명이 당연시되던 선수가 아예 드래프트에서 배제된다. 애초에 아마추어 선수 전부가 프로 선수가 될 수는 없지만, 실력과 무관한 드래프트 지명 때문에 억지로 선수 생활을 관둬야 하는 이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차마 나의 입으로 말하기도 어려운 밀실 거래의 결과다. 학연, 지연, 흡연 등으로 서로 봐주고 밀어준 결과는 기형적인 취업이다. 극소수의 스포츠 팬들 아니면 알기 어려운 장벽이 만든 비극이다. 아마 더 많은 비극이 숨어 있을 수도 있으리라.



현대무용이나 클래식 음악계 같은 순수 예술이라고 이런 부분에서 자유로울까? 자기들끼리 최고의 안무가라고 받들어 칭찬하기 바쁘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핫한 피아니스트 어쩌고 운운한다. 그런데 그럼 뭐하나? 정작 대중들은 그들의 대화와 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관심을 두고 싶어도, 장벽이 관심을 가로막는다. 사람들의 관심은 임윤찬에게 있지, 예술가들끼리 선정한 전문가에는 관심이 없다.


가끔 무용 관련 모임이나 무용 공연을 가면, 대부분 무용수나 안무가의 지인들이다. 진짜 무용을 좋아해서 오는 대중들은 별로 없다. 공연 예술 중에서 뮤지컬은 그나마 고정적인 팬덤이 있지만, 무용은 그런 팬덤도 찾기 어렵다. 폐쇄적인 지인 장사는 매출을 창출할 수 없다.


어떤 산업의 폐쇄적 운영은 산업의 순환을 스스로 옥죈다. 기업이 내부 출자로만 자본을 창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외부로 통하는 창구가 없으면 문제를 진단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어렵다. 억지로 돈을 벌려다가 가요 표절과 같은 부작용을 낳는다. 폐쇄된 산업은 스스로 괴물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문화체육관광부나 각 지역의 예체능 관련 재단의 금전 지원에만 의존하다가 자생력을 잃은 예체능 업자들이 징징대는 현실을 많이 봤다. 하지만 자생력 상실은 그들이 세운 장벽 때문에 스스로 함정에 빠진 꼴이다. 정말 자생력을 얻고 덜 부패한 업계를 보고 싶으면, 장벽부터 부숴라. 알아먹지도 못할 전문 용어를 쉽게 바꾸고, 대중들에게 계속 다가가라. 지방 자치 단체들도 법률 용어를 쉽게 바꾸는 마당에, 뜬구름 위에 떠다니는 예술 언어를 버려야 하지 않나?


여기에 더하여 예체능 교육도 갈아 엎어야겠지. 일반 학교의 몇 명만 운동부로 빠지거나, 예중/예고에서만 예술을 가르치면 자연히 장벽은 생긴다. 이건 대한민국 교육 전반의 문제라서 해결할 덩어리가 너무 크지만, 적어도 예체능 교육의 의무화가 교과 과정에 들어갈 틈은 있어 보인다. 


이게 대한민국 모든 학교에 자리잡아야 한다


폐쇄된 장벽이 대한민국 예체능의 비극을 얼마나 더 만들지는 도저히 예측 못하겠다. 다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얘기하고 싶다. 진짜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결국은 장벽을 허물고 스스로 장벽 안에서 뛰쳐 나와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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