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와 주도권에 대한 아이디어
미술 전공자인 지인과 전시를 보고 나와 전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전시 관람이라는 행위에 대해 재밌는 생각이 들어 적어본다.
전시를 본다는 것은, 작가의 기억, 경험, 생각을 바탕으로 창조해낸 작은 소우주를 접하는 일인데 우리는 미술관에 들어가 작가의 일부분과도 같은 작품들을 매개로 작가와 소통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즉 [작가-작품-관람자]의 형태로 작품을 가운데 두고 작가와 1:1대면을 하는 셈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타인과 만나 대화하고 관계를 맺어가는 것과 같다. 여기까지는 평소 관람에 대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득 오늘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은 이렇다.
우리는 모태에서 나와 세상에 떨어진 그 순간부터 바로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와 만나고 대면하며 말을 모르던 순간마저도 육체적 접촉으로 시작해 타인과 교감하고 소통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호 간 의사소통의 순도 100% 전달이라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언어의 차이 등의 환경적 문제의 수준을 떠나서 그렇다. 왜 불가능이 전제되는지는 다른 글에서 다시 한번 설명할 기회를 갖도록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즉 무의식 안에서라도 소통의 실패(전체든 부분이든)로부터 소위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이 스트레스는 부정적 의미보다는 중립적인 자극의 의미에 조금 더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스트레스는 그 이후 타자와의 관계 형성에 여러 가지 영향을 갖는다.
다시 전시 관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전시를 '관람'하며 작가와 소통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소통이라는 것이 분명히 소통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관람자 개인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그 관람자의 세상을 구성하는 일부이며 그 일부의 의미나 모양이 어떻게 변형이 되든 그것에 간섭은 없다.
우리는 바로 이 소위 '간섭 없는 소통' 즉, 스트레스가 완화된 소통을 통해 관계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것은 특히 현대미술일수록 상대적으로 작품의 가이드라인이 낮아지고 넓어지는 것과, 소통의 폭이 갈수록 넓어지는(그만큼의 스트레스의 발생 가능성 증가를 의미한다) 시대에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것이 꽤 관련이 있지 않을까란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너무 압축적이고 극단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정리해보면 미술관에서의 작품 관람을 통한 개인 내면의 화학작용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주도권을 느끼게 하며 (과격하게는 우월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스트레스의 발생 전의 사전적 차단과 나아가 기존 스트레스의 해소에 꽤나 자기 위안적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 스스로 왜 전시를 좋아하고 보러 다니는 가에 대한 나름의 재밌는 생각이 되었으며 전공자가 아닌(전공자는 매우 흥미롭게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의 관람 행위의 이유에 대한 접근을 했다) 온전한 비전공자이자 관람자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었던 생각이었음에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