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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ho Song Sep 27. 2017

Lonnie Johnson (로니 존슨)

Early Jazz 1

                                                                            

                                                    Lonnie Johnson 의 젊었을 때 모습과 그의 기타



아메리칸 블루스와 재즈싱어, 기타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블루스 작곡자였던 Lonnie johnson (1899~1970)은 우리에겐 재즈 기타리스트 보단 블루스 뮤지션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초기 재즈 뮤지션에서 뺄 수 없을 만큼 재즈 기타리스트로 써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의 초기 음악 커리어면 에서는 Eddie Lang, Louis Amstrong, Duke Elington 등 당대 최고의 재즈 뮤지션들과 함께 할 정도로 재즈 기타리스트로의 위치는 독보적이었고 벤조와 함께 반주 역할에만 그치던 재즈 기타를 Lang, Carl Kress 그리고 Dick McDonough와 함께 기타라는 악기의 솔로리스트로의 가능성과 솔로 기타의 방향을 확립시켰다는 면에서 그는 초기의 재즈 기타리스트에선 가장 중요한 인물로 뽑히곤 한다. 


 연주면에서는 남부지방에서 자란 지형적 특징의 영향 때문에 주로 블루스를 가장 많이 연주했었는데 그의 뛰어난 스윙감, 테크닉 그리고 음악적 감성 등으로 델타 블루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Robert Johnson, 최고의 락엔롤 싱어였던 Elvis Presley, 세계적인 팝 싱어 Bob Dylan 등  블루스, 컨츄리, 초기락 각 장르의 대부격 뮤지션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가, 연주자들에게 큰 음악적 영감과 연주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다. 또 그는 컨츄리 블루스 기타 스타일뿐만 아니라 T-bone Walker 등 일렉트릭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경력과 실력으로만 봐도 실로 어마어마 한 Lonnie John은 대부분의 천재들과는 다르게(?) 오래 살았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70년 가까이 오랫동안 음악을 하면서 초기의 재즈와 블루스 기타의 역사에 많은 흔적을 남겼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다. 일찍이 가족을 다 잃어야 했고 음악가로 큰 명성을 떨쳤지만 2차 대전을 겪었으며 2차 대전에 전후로 그는 생계를 위해 음악을 떠나야 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음반을 내고 유명해지기도 한 인생의 업 앤 다운을 많이 겪어야 했던 산전수전 다 겪은 뮤지션이라 하겠다. 어쩌면 그의 인생은 그의 음악적 황금기 속에 1,2차 대전과 세계 대공황을 격어야 했던 그 시대의 많은 뮤지션들 따라 삶이 그렇게 성공을 따라가지 못한 우리들에게도 위로하듯 그도 그렇게 힘들게 살았노라 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거 같다. 



                                                                                Lonnie Johnson, Circa 1935



Johnson은 1899년 2월 8일 알론조 존슨(Alonzo Johnson)란 이름으로 미국 루이지애나 주 에있는 음악의 도시 뉴올리언스에서 음악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등 다양한 악기를 공부하고 연주했으며 또 만돌린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타에 매력을 느껴 기타 연주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후에 기타리스트로써 프로페셔널 한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다. 그의 연주 특징 중의 하나인 한 줄 연주 스타일(single-string solo guitar style)은 모던락과 블루스, 재즈 연주가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가족 분위기 덕분에 일찍이 그의 음악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늦은 10대의 나이에 그는 그의 가족밴드에서 기타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하였고 또 그는 뉴올리언스에 있는 Storyville이란 지역에서 재즈 트럼펫 연주자인 Punch Miller와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1917년 그의 밴드는 영국 투어를 가게 되고 2년 뒤 돌아왔을 때는 비참하게도 그사이 그 동네를 강타했던 심각한 유행성 전염병으로 형인 제임스 존스를 제외하고 모두 사망하게 된다. 그 뒤 1921년 그는 그의 형과 함께 세인트 루이스로 가게 되고 거기에서 그들은 듀오 연주를 시작하게 되고 동시에 선상에서의 파티 연주와 Charlie Creath and Fate Marable의 오케스트라 등에서 연주활동을 이어간다. 


1925년 존슨은 결혼을 하게 되고 그의 와이프인 Mary johnson은 Lonnie의 작곡과 그의 연주적 역량을 키우는 것을 도우게 되는데 이에 그의 영향으로 자신도 블루스 뮤지션으로써 의 커리어를 쌓게 된다. 서로 각자의 음악인의 길을 존중한 두 사람은 각자 음악인의 길로 가지만 안타깝게도 한 번도 같이 듀엣으로 연주하진 않는다. 그들은 6자녀를 남기고 1932년에 이혼을 하게 된다.



                                               Johnson in Chicago 1941 Photo Wikipedia



특히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1925년 존슨은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Booker T, Washington Theatre에서 열렸던 블루스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하게 됨으로 이에 상금으로 음반을 녹음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후 1925년에서 1932년 사이 그는 주로 블루스를 많이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그 레코드 회사의 가장 유명한 뮤지션이 되어 130여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블루스 연주자로서 더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그렇지만 그는 후에 그 일을 후회하기도 했는데 그는 블루스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의 욕심도 컸기에 블루스를 주로 연주해야 하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 듯하다. 그 후  블루스 뮤지션으로써 Victoria Spivey와 country blues singer인  Alger "Texas" Alexander와 연주했으며 또 Bessie Smith와 함께 최고의 극장인 Theater Owners Bookers Association에서 연주하기도 하였다. 


1927년 그는 시카고에서 Louis Armstrong and HIs Hot Five라는 역사적 밴드에 기타리스트로 참여하는 한편 그가 녹음한 "I'm Not Rough", "Savoy Blues", and "Hotter Than That."곡 들은 그의 뛰어난 연주력으로 많은 뮤지션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또 그는 1928년 Duke Elington과 같이 작업을 하였고 "Hot and Bothered", "Move Over", and "The Mooche"같은 곡들을 녹음하기도 하였다. 이 곡들에서의 그의 연주는 후에 Charlie Christian and Django Reinhardt에게 새로운 기타리스트로의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기는 계기가 되었다. 


1929년 그는 Eddie lang과의 듀엣 연주를 시작하였고 이는 최초의 흑인과 백인 뮤지션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기록된다. 당시 흑인과 백인은 버스나 식당에서 앉는 자리가 달랐으리 만큼 인종 차별이 심했다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사건이다. 그시기 그는 블루스 연주보단 재즈 스타일의 연주에 독보적이었으며 더 특출 났으며 이 시기의 연주는 후에 올 재즈 뮤지션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1929년 리코딩 회사의 파산으로 일자리를 잃으며 음악계를 떠나야 했으며 철강공장에서 일을 했으며 그 후 1932년 오하이오주에 있는 클리브랜드로 이사가 라디오 연주를 하게 되며 다시 음악계에 복귀하게 된다. 그 후 1939년까지 시카고에서 음반과 연주활동을 하며 그의 음악적 행보를 이어가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일렉트릭 기타로 처음 연주하기도 한다. 



                                                            1960년대 그가 일렉 기타로 연주를 하는 모습 


세계 2차 대전 후 그는 rhythm and blues로 장를 바꾸어 새로운 음악을 하게 되는 데 1948년 "Tomorrow Night", Pleasing You", "So Tired" and "Confused"이란 곡으로 그는 엄청난 히트를 터트리며 빌보드 알엔비 차트에 7주 동안 이름을 올리며 엄청난 음반 판매량을 남기기도 했다. 그 후 그는 필라델피아로 이사하게 되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업 앤 다운을 겪으며 험난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의 엄청난 음악적 커리어를 뒤로하고 생계를 위해 음악을 떠나 있어야 했고 철강공장에서 밀대질을 하며 생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59년 우연히 일하게 된 필라델피아에 있는 Benjamin Frankilin Hotel에서 유명 라디오 DJ인  Chris Albertson을 만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다시 그는 음악계로 복귀하게 되고 수많은 음반을 녹음하게 됨으로 이에 그는 다시 옛 명성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 그는 Duke Ellington의 오케스트라에서 다시 연주하기도 했으며 1961년에는 그가 처음으로 몸담아서 유명하게 된 레코드 컴퍼니로의 복귀를 하게 되고 유럽투어를 가기도 한다.


그 뒤 그는 캐나다의 토론토로 이주하게 되어 그곳에서 노년의 활동 중 1969년 길을 건너던 중 차에 치이게 되어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고 1년 뒤인 1970년 6월 16일, 토로토에 있는 Mount Hope Cemetery 병원에서 죽게 되고 그를 따르던 뮤지션들과 많은 친구들에 의해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아래는 Bob Dylan의 회고록에서 그가 Lonnie Johnson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한 내용이다.

"I was lucky to meet Lonnie Johnson at the same club I was working and I must say he greatly influenced me. You can hear it in that first record. I mean Corrina, Corrina...that's pretty much Lonnie Johnson. I used to watch him every chance I got and sometimes he'd let me play with him. I think he and Tampa Red and of course Scrapper Blackwell, that's my favorite style of guitar playing."


https://www.youtube.com/watch?v=otflQ7z3ZzU
            

 그의 후기 블루스 명반인 Blue & Ballads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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