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웅성 Jul 12. 2023

밥은 먹고 다니니...

온정(溫情)

제 밤에는 지렁이들이 땅 속을 탈출해 살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피부로 내일 비 소식을 감지한 지렁이가 신기하다가, 피부로 공기 속 다른 기운을 느끼는 지렁이가 달리 대단해 보였다. '나보다 낫구나.'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변화에 그리 예민했던가, 나는 지렁이만큼 열심히 생을 애정했던가. 내 안에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 마음을 놓치기 일쑤였고, 나를 보호하느라 다른 사람 마음을 외면했고, 생의 끝을 기다린 날도 많았으니, 나보다 낫구나 싶기도 했다.


지렁이를 바라보는데 문득 우리집 강아지가 떠오른다. 둘의 표정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보니 동물들의 표정이 대략 비슷하고, 내가 아는 몇몇 사람도 유사한 표정을 갖고 있다. 공통성이 무엇일지 가만 생각해 보다, 생각과 감정에 몰두하지 않는 관찰하고 그저 행동하는 이들의 표정이 아닐까 싶었다. 생각과 감정은 나름의 표정이 있어 생각과 감정이 가득한 눈빛은 어쩐지 다른 데가 있다. 그래서 예전에 어떤 사람은 내게 이렇게 말한 걸까. "하여튼 뭔가 특이해. 뭔가 달라."


한차례 억수같이 쏟아진 비 끝에 젖은 어제의 땅은 더 많은 지렁이들의 피난대피소가 되었다. 잠깐 그친 비 틈을 타 운동하던 사람들의 발치에 밟힌 지렁이들의 사체도 여럿 보인다. 큰 바다 위를 메운 함선처럼 30cm은 족히 될 세 마리 지렁이가 살 곳을 향해 맹진 중이다.


비 온 뒤 나선 길에서는 차마 고개를 들고 걸을 수가 없다. 어디서 꿈틀대고 있을지 모를 지렁이를 밟아서는 안된다. 저렇게 살고자 애쓰는데 짓밟을 수 없다. 저 생과 내 생이 다를까. 살고자 하는 애씀이 다를까. 살아내려는 생의 의지에 숙연해져 땅을 샅샅이 살피며 걷는다.


옆을 지나던 행인이 동행하는 이에게 전하는 말소리가 들린다.

"아, 징그러. 난 땅을 안 보고 걸을래."

'아뿔싸, 안 돼요. 그러면 지렁이가 밟혀요. 가녀린 생명을 가엽게 여겨주세요.'하고 울리는 소리는 마음속에서  일었다 사라진다. 찡한 진동을 가슴에 남긴 채.


우리는 각자의 생의 의지 크기만큼 살아간다. 살아가다 험한 길을 지나고 고비를 넘고 산을 넘고 또 다른 산을 만나며 시지프스의 돌을 이고 가는 동안 역치가 커진다. 그래서 또 더 높은 고비를 넘을 수 있다.


한 밤의 지렁이를 보며 살아내려 애쓰는 사람의 모습이 겹쳤다. 그 삶의 대단함에 고단함에 전할 말이 너무 많아서, 주고 싶은 위로가 너무 깊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때 넌지시 한 마디 말로 마음을 대변하고 싶다.

"밥은 먹고 다니니..."

말로 다 할 수 없어 따뜻한 온정을 건네고 싶다.







#지렁이 #삶 #정 #위로 #온정 #생의 의지

매거진의 이전글 한강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