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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샷뜨아 Jan 04. 2023

12년 차 부부의 내려놓음

서로에게 솔직해지다.

30년 이상을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오던 서울 남자와 경상도 여자가 있다. 외모도, 성격도, 취향도 참 많이 다르다. 서로 다른 모습에 자석처럼 끌렸나 보다. 부부는 살다 보면 닮는다고 하는데, 이리보고 저리 봐도 닮은 구석이 없다. 다른 모습이 존경스러우면서도, 다른 모습에 싸우기도 한다. 부부 사이 문제에 수많은 조언들은 무용지물이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길 바라면서 이해의 간극을 차츰 줄여나갈 뿐이다.


체크무늬 남방이 잘 어울리는 똑똑 박사 남자와 외국어로 계약을 따내던 감성박사 여자는 거울 속의 대화를 한다. 남자는 코딩을 하듯 서론-본론-결론 순으로 이야기를 꺼내고, 성미 급한 여자는 결론-본론으로 대응하며 대화는 매번 파국으로 치닫는다. 대화를 시작한 남자 쪽에서 보면 여자가 방어하면서 싸우자고 덤벼드는 꼴이다. 감정을 앞세우는 여자는 이성적인 남자를 이길 수가 없다. 여자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것을 고려하여 차근차근 대화법을 시도해 본다.


어느덧 40 중반, 중년이 된 남자는 급격히 불어난 체중과 운동시간의 부족으로 고혈압, 고지혈증이라는 병명을 얻게 된다. 약만 잘 챙겨 먹으면 더 나빠지지 않는다니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부부는 서로에게 보호자가 된다. 여자는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힘든 것인지 알기에 남자가 가여워 보인다.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의사의 부름에 동반 입실 하였다. 매번 함께 들어가니 의사가 부부의 얼굴을 기억할 정도이다. 추가 약을 처방받으러 가던 어느 평범한 날, 여자는 의사를 의식하여 그날은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남자는 버럭 화를 낸다. "오늘은 왜 안 따라 들어와? "  여자는 걱정스레 물었다. "왜? 의사가 뭐라고 그래? 오늘은 약만 추가로 받는 거 아니었어? " 남자는 다그친다. "그걸 왜 네가 판단해? " 아이처럼 씩씩 거리며 볼멘소리로 진심 아닌 소리를 뱉어버린다. "그렇게 귀찮으면 앞으로 병원 나오지 마. 나 혼자 다닐 테니까."  

여자는 황당했지만 남자를 달래기로 한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였음 병원에 오지도 않았지, 내가 누구보다 오빠 건강에 관심이 많은데~ " 그리고 본론을 꺼내어 본다. "그런데 의사가 뭐라고 그래? 약 추가로 더 받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 그랬더니, 남자의 솔직한 진심이 툭 튀어나온다. "몰라~ 난 의사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단 말이야."  여자는 순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남자는 똑똑 박사가 아니던가. 의사말을 못 알아듣는다니, 남자가 어른아이로 보인다. 토닥거려줘야 할 것 같다. "미안해, 그런 줄 몰랐어.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필요한 존재인지 몰랐어." 

계획적이고 완벽을 추구하는 남자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여자에게 감추고 있었다. 이제 좀 편해진 걸까? 그동안 겪었던 이해되지 않은 수많은 갈등들이 그의 솔직한 한마디로 인해 망각의 저편으로 흩어지는 것 같다. 




정리 개념 역시 너무나 다른 둘. 남자는 물건이 밖에 놓여 있는 게 싫어 무조건 수납해서 넣길 원한다. 여자는 깔끔하게 쌓아놓기만 하면 거슬리는 게 없다. 이러니 남자의 잔소리가 늘어간다. 그 잔소리가 듣기 싫은 여자는 남자가 지정한 곳에 물건을 두는 것으로 정리한다. 어느 날 갈 곳 잃은 일회용 젓가락 다발 묶음이 남자의 눈에 띄었다. 환경 보호 차원에서 일회용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일회용 젓가락이 많이 쌓였다. "내가 오래전부터 봐왔는데, 아직도 그대로 있네?" 남자의 잔소리 폭격이 시작된다. "내가 정리할게, 그냥 둬~" 여자는 폭격을 피하려고 숨는다. 남자는 여자 말을 무시한 채 젓가락을 죄다 꺼내놓는다. 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여자는 정면돌파 하기로 한다. "오빠는 정리가 중요하지만 난 그게 신경 쓰이지 않은 사람이잖아. 대신 오빠가 정리하라는 대로 유지 잘하는 거 알지? 사실 어디에 정리해야 할지 몰라서 거기 모아 둔 거야." 남자는 여자의 솔직한 말에 싫지 않은 눈치이다. "그렇지, 네가 유지는 잘하지. 그럼 다음부터는 어떻게 정리하면 되는지 물어봐." 남자는 더 이상의 잔소리 없이 수납할 곳을 찾아 정리를 마무리해 준다. 사실 여자는 정리를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어렵다. 하지만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상대에게 솔직한 것임을 곧 깨닫는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어 서로 다름을 인정할 뿐 아니라 약점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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