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직, 박스 하나면 충분
현재 스페인 카탈루냐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외국노동자(외노자)로 일하면서 보고, 듣고, 만나고, 경험했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외국 영화에서 종종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직장 상사와 대판 싸우고 박스 1개를 들고 쓸쓸하게 건물을 나선다.
주인공은 박스에 담긴 짐을 들고 먼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길을 떠난다.
난 영화를 볼 때마다 이 장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직하는데 쓰던 물건은 다 놔두고 달랑 박스 1개만 들고 퇴사한다고?"
"영화라서 너무 과장된 모습 아닌가?"
"작가가 제대로 직장 생활을 못 해봐서 그럴 거야....... "
한국에서 다녔던 직장에는 정말로 많은 짐이 있었다.
각종 참고자료, 서류, 보고서가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필기류도 늘 필통에 가득 차 있었고 사무용품이 늘 널려 있었다.
몇 년 전 한국 사무실에서 쓰던 방을 옮긴 적이 있었다.
이 작업을 위해서 내 직장 후배들이 같이 하루 종일 짐을 같이 날라줬고 정리하는데 꼬박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곳에 와서 처음 배정받은 자리는 6명이 같이 쓰는 공간이었다.
내 책장에서는 노트북과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첫 출근한 날 작은 수첩 1개와 흑색, 청색, 적색 볼펜 각각 한 자루를 받았다.
6명이 근무하는 사무공간에는 스템플러 1대가 있다.
모든 사람이 같이 공유한다.
허술한 사무용 가위도 1명이 본인 책상 위 연필통에 꽂아두고 있다.
6명이 같이 공유한다.
사무실에 책꽂이와 캐비닛이 4~5개 정도 있는데 대부분 텅텅 비어 있다.
책 1~2권이 꽂혀 있다.
내가 근무하는 곳에는 3층 건물에 1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각 층에는 공용 프린터가 1대씩 있고 사람들이 같이 사용한다.
한국에서는 개별적으로 프린터를 각 방에서 사용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일이 없다.
얼마 전 내가 일하고 있는 건물에 자리 배치가 조정되었다.
기존 2층에 근무하던 직원들이 3층에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한국 같으면 이사하는데 며칠이 소요될 일이었는데 여기서는 이사가 반나절에 다 끝나버렸다.
본인이 쓰던 노트북, 모니터, 키보드와 간단한 사무용품만 챙기면 이사가 끝났다.
이곳 사람들은 불편함(?)이 몸에 배어 있다.
그래서 웬만한 불편은 그냥 감수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사무용품에 대한 미련도 적고 상대적으로 짐이 없다.
오늘도 같이 일하던 한 친구가 이직을 했다.
마지막 출근하는 날.
그 친구는 배낭 하나를 메고 조만간 연락을 하자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회사를 떠났다.
이곳에 와보니 많은 친구들이 수시로 이직을 하고 새로운 사람이 충원되고 있었다.
한국처럼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을 찾아볼 수 없는 문화였다.
이직하는 친구들 모습을 보면 작은 종이 박스 하나면 모든 짐을 담을 수 있었다.
이직 인사도 아주 간단하다.
어떤 친구는 부서 내 단체 메일로 이직 인사를 남기고 가는 친구도 있었고 어떤 친구는 아무런 말도 그냥 짐만 챙겨서 간 친구도 있었다.
이직을 한다고 송별 회식이나 파티도 없다.
주변 동료들끼리 1인당 5유로 정도를 모아서 작은 선물을 해주는 것으로 이직 파티를 대신한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이직을 한다면...... 상상을 해보았다.
당장 한국 사무실에 있는 잡동사니를 챙기기 위해서는 몇 개의 박스가 필요할지 상상이 안된다.
집에서 들고 간 커피메이커, 각종 차 기구, 전공 관련 서적, 교양서적, 여분의 신발, 액자 등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이곳에 오면서 다 버리고 와도 되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나를 구속하는 경우가 있다.
비움과 무소유의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