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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몸글몽글 Nov 06. 2017

세헤라 자데

스포츠와 깊은 사유 - 최정규


2009년 ISU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                                  김연아 선수경기 장면



김연아 선수는 2009년 ISU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남자 싱글경기에서만 존재했던 200점대의 점수를 김연아 선수가 여자경기에서도 처음으로 써냈기 때문이다. 207.71점이라는 압도적인 신기록의 탄생을 도와준 산파의 이름은 「천일야화千一夜話」이다.     


천일 하고 하루를 더한 천 하루의 밤을 이야기로 채웠다는 천일야화. 이야기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인도와 중국까지 통치한 사산왕조 샤푸리 야르왕은 아내에게 배신당해 모든 여성을 믿지 못하고 증오하게 된다. 그 결과 왕은 매일 새로운 신부를 맞이해 동침한 뒤 다음날 아침에 죽인다. 이 일이 계속되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백성들은 공포에 떨게 됐다. 이 때 한 대신의 딸 ‘세헤라자데’는 자진해서 왕의 침실로 들어갔다. 세헤라자데는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왕은 계속 듣고 싶어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이야기는 천일(千一)까지 이어졌고 그 사이 여자에 대한 왕의 생각은 바뀌게 됐다. 왕과 세헤라자데의 결말은 예상대로 해피엔딩이다.  

    

이 이야기는 1888년 ‘림스키-코르사코프’에 의해 음악으로 탄생하였고, 3대 관현악곡으로 꼽힐 만큼 명성이 대단하다. 시간이 흐른 후 ‘세헤라자데’는 문학과 연극, 영화를 거쳐 마침내 스포츠 예술과 만났다.「천일야화」와 「피겨 스케이팅」.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둘이지만 1976년 존 커리로부터 2009년 김연아까지 9명의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선수들이 ‘세헤라자데’와 함께 멋진 무대를 연출 했다. 문학과 음악 그리고 체육의 만남. 이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내가 주목한 점은 김연아의 인문적 소양과 통찰에 이은 깊이 있는 몸의 사유이다.     


중용 23장을 보면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베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혀지고 밝혀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라는 말이 나온다.  김연아의 ‘세헤라자데’의 작품 준비와 경기를 중용 23장의 내용에 맞추어 상상해본다.  

    

김연아는 「천일야화」를 읽으며 자신이 세헤라자데가 되어 상상했으리라.
수십 번.
그리고 ‘세헤라자데’ 4악장을 들으며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가지었으리라.
긴 시간. 
실제 세헤라자데가 되어 몸을 움직였으리라. 수만 번.
 경기장은 궁전이 되고, 침실이 되어 왕에게 이야기 하듯 움직인다. 
감동에 못이긴 박수들이 사방에서 피어난다.     

 

난 이 상상이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라 생각한다. 김연아의 경기를 보면 누구든 나와 같은 상상을 하게 될 것이다.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 대장이었던 산악인 김영도 씨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산을 오르는 것은 altitude(고도)가 아닌 attitude(태도)이다.’ 산에 대한 깊은 철학적 사유는 산을 오르는 행위가 운동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법이나 태도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또한 사유과정을 통해 쌓인 가치나 미덕이 내면화되어 진정한 삶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김연아 선수의 연기는 사유하는 몸이 만들어낸 한 정점이라 할 만하다. 그의 연기는 공동체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왕비 세헤라자데의 내면을 찾아 빙의함으로써 예술이 됐다. 바로 이 절대적 몰입이 세헤라자데를 연기한 다른 9명의 선수와 김연아를 갈라놓은 지점이다. 



글쓴이 : 최정규(두레자연고등학교 체육교사)

행복한 교실과 행복한 체육수업을 꿈꾸는 로맨티스트. 주요 관심사는 대안교육과 sport pedag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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