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묘에 가는 걸 좋아한다. 다들 알듯이 동묘에는 구제시장이 있다. 구제시장에서 상인들은 옷을 바닥에 산처럼 쌓아놓고,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산을 비집고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옷을 '발굴해'낸다. 상인들은 외친다. '그냥 보면 고물! 잘 보면 보물!'
내가 동묘에 자주 간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물어본다. '근데 그거 죽은 사람들한테서 가져온 옷 아냐?' '재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하기도 한다. 그럼 나는 기분이 이상해진다. 왜? 죽음은 너무도 당연하게 기분 나쁜 것으로 인식된다. 피해야만 하는 두려운 것으로 인식된다. 죽음은 너무나 많지만, 오늘도 뉴스에서 누가 죽었고, 누가 죽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죽음은 어디에서나 목격되진 않는다.
두려운 것을 넘어서, 우리는 죽음을 죄악시한다. 누군가 당장 '나, 자살을 생각하고 있어' 라고 한다면, 우리는 모두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정말 우리의 생각처럼 두려운 것이며, 죄인 것일까? 자살이 아닌, 그저 죽음과 삶이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살기를 선택했고, 누군가는 죽기를 선택한 것 뿐이다. 더군다나 자살은 우리의 필요와 입맛에 따라 추앙되기도 하고, 죄악시 되기도 한다. 인도의 사티, 그러니까 과부가 죽은 남편을 따라 자살하는 그 '문화'에서 신부는 고결한 이처럼 추앙되었고, 자살을 한 기독교 인들은 죄인으로 취급당해 땅에도 묻히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 차이가 '자신을 위해' 자살하느냐, '누군가를 위해' 자살 하느냐의 차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자신의 죽음까지 온전히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 없다면 나에게는 이 삶이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자살의 사회학'이라는 책에는 흥미로운 통계가 나온다. 일반 감옥에 갇힌 사람과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을 비교해 어느 집단의 자살률이 더 높을까? 유대인 수용소의 절망적인 상황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이 자살을 선택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나 아렌트와 다른 생존자들의 말에 의하면, '자살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책의 저자는 그 이유를 유대인들의 결속력 혹은 죽음의 일상화 등에서 찾지만, 나는 그 이유를 고통에서 찾는다. 고통은 모순적이게도, 사람을 살게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고통 때문에 죽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고통 때문에 살아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가 가장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고통을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순간은 시간 속에서 버티고 있는 나의 몸뚱아리가 너무도 명확하게 인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잘 살아남았다'고 해줄 수 있을까?
그 고통 속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끊지 않은 것에 대해서 치하해 주어야 할까? 대체 왜? 나에겐 그럴 권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들이 죽었어야 했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저, 그건 '선택'이었을 뿐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는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살기를 선택했고, 또 누군가는 죽기로 선택한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