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한 압축
서재 왼편 창문 너머로 빈 밭이 보인다. 봄 농사에 대비해선지 군데군데 비료를 쌓아놓았다.
그 위를 한 무리의 까마귀 떼가 분주히 날아다닌다.
앞마당 장미 나무 울타리 가지에는 늘 참새들이 앉아 있다.
맞은 편집 마당의 강아지는 길게 매어 놓은 줄 사이를 쉬지 않고 좌우로 종종걸음 친다.
자판기를 두드리다 말고 둘러보는 내 눈에는 나만 빼놓고 모두가 바쁜 듯싶다.
‘나도 한때는 시냇물처럼 바빴으나 누구에게서 문자도 한 통 없는 날 조금은 세상에게 삐친 나를 데리고...’
얼마 전에 읽은 시구절이 생각나는 시간이다. 그 생각은 이내, “저 놈들은 뭐가 저리 바쁠까?” 궁금하다가 이내 “ 모두가 먹거리를 찾아 바쁘군” 그리고 다시 “사람들이 바쁜 건?” 하는 데 까지 미친다.
결국 다 먹고살기 위함이요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의 그것은 ‘내일에 대한 대비’란 명목으로 한계를 두지 않는다는 차이로 귀결된다.
우리 말로는 ‘미래 중독자(The invention of tomorrow)’로 번역, 소개된 책에서 저자 다니엘 밀로(Daniel S. Milo)는 인류 최대의 발명은 ‘내일’이며 바로 그 내일이라는 미래에 대한 대비로 오늘의 문화와 문명을 이룰 수 있다고 얘기한다. 과연 그러한 지에 대한 찬반 논의는 뒤로하고...
밀로의 얘기대로라면 우리가 일을 찾는 것 또한 내일이라는 미래에 대비하기 위한 작업이다.
직업을 찾는 작업 이 전에 미래에 대한 이해를 위한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내일이, 미래가 과거 농업사회처럼 자고 나면 어제와 똑같이 변화가 없는 세상이라면 별 문제없다. 아니, 산업사회처럼 점진적이어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 그러나 요즘처럼 눈뜨면 달라지는 세상에선 결코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잘 아는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방한해서 강연할 때마다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는 써먹지도 못할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국 교육에 대해 강하게 지적하고 비판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의 미래 연구소나 언론 기관들이 ‘지식 반감기’니 ‘소멸하는 직업’이니 해서 달라지는 ‘내일’에 대해 경고하고 있지만 ‘일’을 찾는 입장에서는 글쎄다.
2년 여를 끌어오던 코로나가 잦아드는 분위기다.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간 듯 활동한다. 외견상 코로나 이 전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엄청난 차이가 숨어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코로나가 미래의 변화를 20년은 앞당겼다고 예견한다. 획일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순 없어도 상당 부분 일리 있는 지적이다. 코로나로 인한 소상공인 지원금 성격을 띤 기본 소득의 지급이 그렇고 네이버가 제일 먼저 쏘아 올린 주 3일 출근 혹은 완전 재택의 커넥티드 워크가 그러하다.
이제 일은 내일이 아니라 10년 뒤를 상정해서 생각해야 할 때다. 혹자는 메타버스가 기술적인 문제로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하지만 단지 시간문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현금 흐름과 저작권을 주도할 블록체인이나 NFT 등 또한 코로나로 중무장한 빅 테크들이 박차를 가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사회 진출을 모색하는 사람들은 내일이 아닌 모래를 살펴야 할 때다. 좀 더 고개를 높이 들고 멀리 바라 볼 필요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