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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윤 Sep 21. 2021

이혼이 한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

외상 후 트라우마로 남을 것인가 혹은 성장할 것인가

나에게는 아주 오래된 꿈이 있었다.

단순하고 남들 다 하는, 마치 사람의 인생에 짜여진 당연한 순서 같은 것.

'결혼'.

어릴 때는 내가 한 28세쯤 되면 정장을 쫙 빼입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바쁜 워킹우먼이 되어있을 줄 알았고 정작 그 나이 때의 나는 대학원에서 과제에 치여 살아가고 있었지만 30대의 나는 사랑하는 이와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듣게 된 엄마와 아빠를 놀리며 다 함께 여행을 가는 꿈. 아이들은 신나게 해변가를 뛰어다니고 엄마랑 나는 그걸 보면서 애들 많이 컸지? 너 어릴 때는 말이야-소리를 들으며 내가 그랬다고? 하면서 손사래 치는 내 모습.

어렵지 않게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럴 줄 알았던 너무나 당연하고 쉽게 보이던 나의 꿈이, 생각보다 이루기 어려운 것임을 난 결혼 후 그리 오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이혼한 지 삼 년쯤 지나고 나서야 이혼의 상처가 아물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삼 년 상이 었는지도 모른다고, 삼 년은 있어야 큰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법이라고 농담처럼 엄마와 웃으며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지나왔던 많은 시간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나의 인생에서 벌어진 가장 큰 일이었기에 그것을 극복하고 받아들여 내 입으로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정작 이혼을 고민하며 나에게 전화를 해온 지인에게는 이혼 그거 별거 아니야-라고 말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이혼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마음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게 사실이다.

예전에 지인이 이혼을 고백할 때 나는 그걸 뭐 그리 어렵게 말해! 잘했어!라고 했지만, 막상 겪어보니 요즘 시대에 이혼쯤이야... 했던 내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깨달았다. 타인의 이혼을 보며 '괜찮다. 별일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더라도 정작 내 상황이 되어보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신경 쓰이는지 깨달은 것이다.

아주 작게는 결혼식에 와서 축하해 주었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민망함부터 나중에 결혼할 날이 오게 될 동생이 상견례를 할 때 혹여나 때문에 흠이 잡히지 않을까 하는 걱정, 사회에서 이혼한 사람을 바라보는 (특히 여자에게) 시선들과 친한 친구들의 시선들까지.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부모님이 당신의 친구분들과 대화할 때마다 그분들의 손주 손녀, 자식들 얘기에 엄마가 가만히 듣고 있거나 딱히 엄마 당신 자식의 얘기를 할 수 없다는 점도 내겐 큰 아픔이었다.

뭐든지 쉽게 잊어버리고 금방 까먹어서 그게 장점이자 단점인 내 성격에서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픔을 안겨준 두 글자 '이혼'은 이 이상 불행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를 절망하게 했고 암울하게 했지만 지금은 그 모든 순간들이 지나온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행을 잊기 위해 뭐든지 해야만 했기에, 하나의 꿈이 무너지니 다른 꿈에 도전해보고 싶어 졌기에 겨우 용기를 내었던 것이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극작 아카데미에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긴 시간들을 무얼 잡고 버텨냈을까?




결혼하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나는 다시 글을 써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큰 결심을 하고 극작 아카데미에 지원했고 합격소식까지 들었는데, 문제는 그러고 나서 아카데미 개강을 한 달여 앞두고 신혼집을 나왔다는 것이었다. 즉, 마음이 산산이 부서진 상태에서 개강일이 다가온 것이다.

친정집에 돌아와 이혼 얘기를 시작하고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공황장애가 이래서 생기는구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잡히질 않아서 여행도 가보고,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로 출근을 하다 보니 솔직히 석 달 정도는 내가 어떻게 일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매일 기계처럼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보내다 밤이 되면 침대에서 숨죽여우는 것이 내 일상이었다. 당시 나의 소원은 내일 아침에 내가 눈을 뜨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중 끊어둔 아카데미 개강일이 금방 다가왔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진지하게 수강취소를 고민했는데 마침 수강 과목이 하나 폐강되며 수강료를 꽤나 돌려준다는 전화가 왔다. 그렇다. 나란 인간은 저렴한 수강료에 흔들리는 단순한 인간이었다. 이렇게 되니 또 안 다니기가 아까운 것이다. 그 정도의 이성까지는 남아있었던 셈이다. 결국 나는 고민 고민하다 초 우울 상태에서 겨우 힘을 쥐어짜내 첫 수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날 집에 오며 수업을 듣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배우고 싶었던 글쓰기에 대한 욕망에 불을 붙여주니 마음은 재빠르게 활활 타올랐고, 그 재미에 강의시간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나갔다. 내 우울한 상황과 이혼에 대한 복잡한 생각을 잊고 오로지 눈앞의 새로운 꿈, 극작 강의에만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마음이 참 편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한데, 그건 아카데미 수강생들이 '나'라는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과, 때문에 내가 처한 상황을 누군가와 공유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즉, 나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곳에서 나는 그저 극작가를 지망하는 한 명의 수강생 신분일 뿐이었고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다음 주까지 과제를 어떻게 해오느냐 뿐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간단히 술도 한 잔 하면서 시답지 않은 얘기를 나누고, 좋아하는 뮤지컬 얘기를 하면서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한다. 복잡한 내 문제를 생각할 필요도 없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의 안심하게 했다.

아카데미에서는 과제가 많았다. 제시된 주제로 글을 쓰고, 고치고, 선생님이 과제를 보고 코멘트를 해주시면 다시 참고해 글을 쓰는 일의 반복이었다. 뮤지컬이란 장르는 극작의 기술에서 음악적인 특정 기술을 요한다.

이를테면 가사 쓰기, 송 포인트(언제 노래가 들어갈지) 잡기와 같은 것 들이다.

좋아하는 뮤지컬에 대해 배우고 직접 써나가면서 정신없는 매일이 흘러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피곤한지도 모르고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나갔다. 밤을 새우는 날들이 계속되었기에 딴생각에 잠길 겨를이 없었다.

친정에 돌아온 후 멘탈이 완전히 붕괴되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날들이었지만, 그나마 아카데미를 하면서 수많은 과제에 치이다 보니 어떻게 겨우 겨우 정신을 잡고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6개월이 훌쩍 지나있었고 슬픈 노래를 들어도 마음이 내려앉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내 지뢰는 이적의 '걱정 말아요 그대'이다.)

그래서 나는 이혼의 상처를 이겨내려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배우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누구나 간직해온 꿈 하나씩은 있지 않은가.

테니스를 배워야지,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어, 전국일주를 떠나야지 하는 여러 가지 것들.

나의 경우 그것이 바로 글쓰기였고 두려움 속에 시작한 글쓰기는 나를 위로하고 일으켜주었다.




극작 아카데미를 다니기 한 두 달 전부터 이곳 브런치에서 '이혼 일기'라는 제목으로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이혼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극복할 수 있게 된 나의 이야기들을, 스스로를 돌아보고 위로해보고 싶은 마음에 두서없이 끄적끄적 적어내려 갔다. 처음에 글을 쓰면서는 울기도 많이 울었다. 글을 쓰기 위해 결혼 생활 당시 내가 적었던 일기장을 뒤적이다 울기도 하고, 지난 에피소드를 떠올리다 다시 울었으며 그러다 이젠 그것도 지나간 과거고 이젠 괜찮다, 라는 생각에 오히려 안심이 되면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기도 했다.  어떻게 그 시간들을 견뎌왔을까. 글을 쓰면서 스스로가 대견해지고 기특해지는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그래. 괜찮아 잘했어. 잘 버텼어. 너는 이만큼이나 성장했구나.

내게 '이혼 일기'는 나를 다독이고 안아주는 위로의 시간이었다. 더불어 얼굴도 모르는 많은 분들이 글을 통해 보내주시는 공감과 위로가 또 하나의 생각지 못한 큰 힘이었다.


브런치 글을 쓰면서 인터넷에서 이혼에 관련해 검색을 해본 적이 있다. 그때 외상 후 성장이란 말을 알게 되었는데, 이 말이 참 인상 깊었다.


["모든 사람은 극심한 충격을 받으면 우울함과 불안증세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에 대처하는 행동은 달라진다. 한쪽 끝에는 PTSD, 즉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극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결국 자살에 이르는 사람들이다. 가운데 분포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초반에 우울증세와 불안증세를 보이지만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충격을 받기 전 상태로 돌아간다. 역경에 대처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을 잘 숙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쪽 끝에는 단순한 회복을 넘어 더욱더 강인해지고, 성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이를 PTG(Post traumatic Grouthㆍ외상 후 성장)라고 부른다. -출처 https://www.mk.co.kr/news/business/view/2011/07/444700/]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를 겪는데 그중 일부 사람들은 이전으로의 회복을 넘어 더 강해지고 성장하며, 전보다 긍정적이고 행복하게 삶을 사는 경우가 생겨났다고 한다.

나는 '외상 후 성장'에 대해 검색했고 서점에서 '외상 후 성장의 과학'이란 책을 찾아내 읽었다.

출처 예스24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이 책이 말하는 외상 후 성장이 바로 나의 경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혼이라는 충격적인 일을 겪었고 그 일을 극복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으며 글로서 나를 위로하고 성장시켰다. 이로 인해 현재의 나는 꿈꾸던 작가라는 길을 걷고 있다. 아마도 이혼이 아니었다면 내가 브런치에 이혼 일기를 연재하는 일도, 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시간도, 작가 아카데미를 다니는 일도 쉽게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에 대한 도피였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 도피를 위해 용기를 내는 것조차도 무척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용기가 나를 버티고 살게 해 준 것 같아 참 다행이라고, 그때의 내가 그래도 그거 하나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혼 일기를 연재하고 글을 써 내려가면서  마음에 진 응어리를 풀어낸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글에 끝이 생겨났다.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약을 바르지만, 다 낫고 나면 바르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글에도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브런치를 잊고 있다가 며칠 전 문득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그러면 이번에는 이혼이 나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나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지금 내 새로운 꿈을 갖게 된 이야기를 해보자. 하고.

말하자면, 이혼 일기 희망 편쯤이 될까?

이제 나는 브런치의 새 챕터를 열어 "이혼이 나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어쩌다 보니 이혼 후 작가란 꿈을 실행 중인, 나의 시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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