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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박 Mar 12. 2022

#2 조안나바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달의 요정 세일러 문

요즘 왓챠에서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을 다시 보고 있다. 우리 집 TV에는 케이블 채널이 없었기 때문에 공중파에서 해주는 <달의 요정 세일러 문>과 <카드캡터 체리>, <천사소녀 네티>는 나에게 최고의 유흥이었다. 오빠가 있었기 때문에 <사자왕 가오가이거> 같은 만화도 열심히 봤다.


문득 우리 집에 <달의 요정 세일러 문> OST 시디가 있었던 게 기억났다.

"엄마, 우리 집에 쎄일러문 씨디 있던 거 기억나?"

"아니"

"엄마가 그걸 왜 사줬을까?"

"네가 사달라니까 사줬겠지"


엄마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를 사달라고 하는 딸이 아니었다. 딱 한 번, 엄마에게 갖고 싶다고 말한 물건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건 바로 씽씽이었다. 킥보드보다 조금 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디자인. 동네 애들이 다 그걸 타고 다녔기 때문에 나도 가져야만 했다. 그것만은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내가 씽씽이에 대한 욕망을 내비친 다음 날. 복도에 나가 음식물 쓰레기 통 위에 올라서서 바깥 구경하는 게 취미였던 나는, 저 멀리서 엄마가 빨간색의 기다란 플라스틱을 들고 오는 걸 발견했다. 저건 나의 씽씽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씽씽이를 주러 올 것이다. 구경하던 자리를 바로 정리하고 집으로 튕기듯이 들어왔다. 나는 애써 모른 척 하기 위에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아직도 그날의 긴장감이 생생하다. 온몸에서 심장이 뛰는 듯했고, 엄마가 씽씽이를 갖고 우리 집에 들어올 때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안 잡혔다.


나의 씽씽이는 "내가 바로 신상"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양쪽 손잡이에는 제기를 만들 때 쓰는 반짝반짝한 은박지, 금박지 종이가 길게 박혀 휘날리고 있었고, 그 누구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매끈한 뒤꿈치를 자랑했다. 아마 엄마는 복도 창문에 작게 솟아 있는 나의 얼굴을 봤을 것이다.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있는 나의 뒤통수를 보고 웃었을 것이다. 씽씽이를 보고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나를 보고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어렸을 때, 맘껏 누리지 못한 것에는 이상한 한이 맺힌다. 나에게는 시리얼, 용가리 치킨, 제티 그리고 조안나바가 그랬다. 조안나바가 재출시됐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엄마, 이거 기억나? 나는 이제 돈 버는 성인이 됐으니 이 아이스크림을 맘껏 사 먹을 거야. 엄마가 꽤 크게 웃었다.


다음 날, 퇴근하고 집에 가니 조안나바가 있었다.

하나를 먹어보니 어릴 적 그 맛과 똑같았다. 아주 그대로였다. 왓챠로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을 보면서 조안나바를 먹으니 어쩐지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게다가 포켓몬빵도 재출시됐잖아? 일어나서 놀이터 갔다가, 집에 와서 저녁 먹고, 퇴근한 엄마 옆에 누워 잠들던 날들 같다. 짱구 극장판 <어른 제국의 역습>이 따로 없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가 할 일은.

엄마가 사준 조안나바




살며시 너에게로 다가가 모든 걸 고백할텐데

엄마는 나보다 두 배를 더 살았지만 아직도 원하는 걸 맘껏 사 먹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조안나바를 스스로 살 기회를 주지 않는다. 엄마에게 말하는 게 아니었다. 다음 날, 이렇게 바로 사 올 줄 몰랐다. 생각해보면 씽씽이도 그랬지. 엄마의 월급날까지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음 날 바로 가질 수 있었다. 엄마는 아직도 나에게 그렇게 한다.


다시 씽씽이를 받는 날로 돌아간다면 복도에서부터 엄마를 기다릴 것이다. 엄마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이게 뭐냐고, 너무 좋다고 방방 뛰면서 엄마를 꼭 안아주고, 정말 고맙다고 말할 것이다.

엄마가 조안나바를 사주는 날이 있다면, 이 아이스크림이 정말 좋은데 엄마가 사줘서 더 좋다고 말할 것이다. 오레오 오즈와 콘푸라이트를 섞어서 먹고 싶지만 둘 중 하나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리고 지금보다 20살도 더 어린 엄마에게 먹고 싶은 걸 맘껏 먹고, 갖고 싶은 건 분기별로 하나씩 사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나중에 크면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엄마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을 물리쳐 주겠다고.


지금 나에게는 마법 소녀의 힘도, 큰돈도 없지만.

엄마, 엄마가 조안나바를 사준 그날부터 나는 이상하게 어제보다 더 용감해지고, 더 씩씩해진 것만 같아. 이게 바로 사랑과 정의의 힘이 아니라면 뭐겠어. 그렇지?


모든 걸 고백한다면, 그저 엄마를 너무 사랑한다는 말이 전부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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