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최애는 양호열입니다
나는 이별하면 <슬램덩크>를 본다. <슬램덩크>를 정주행 하면, <슬램덩크> 말고는 아무 생각도 안 들기 때문이다. 요즘은 타이레놀을 먹는다던데, 혹시 슬램덩크 요법을 안 써봤다면 강력하게 추천한다. 헤어지는 순간에 나눴던 대화나 앉아 있던 카페 이름, 내가 시켰던 메뉴 같은 게 상관없어진다. 북산 농구부에 정대만이 쳐들어왔는데 그때 마셨던 녹차라떼 따위... 무슨 상관 인가.
<슬램덩크>는 몇 번을 읽어도 매번 처음 읽는 것 같은 재미와 두근거림을 선사해준다. 그 시절 오빠를 따라 만화 꽤나 읽어봤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제일 재밌는 걸 꼽으라면 슬램덩크다. (<상남2인조>를 그렇게 어릴 때 보면 안 됐었는데...)
언젠가 독립하여 큰 책장을 가지게 된다면 <슬램덩크> 전권을 사고 싶다. 요즘도 중고나라나 당근마켓에 가끔 검색해보곤 하는데 제발 내가 독립할 때까지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완전판과 31권으로 끝나는 오리지널 두 개를 갖고 싶다.(^^)
내 주변에는 나만큼이나 <슬램덩크>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아직도 <원피스>를 모으는 중학교 동창과 <명탐정 코난>을 모으는 직장 친구가 있지만, <슬램덩크>에 대해 대화를 나눌만한 사람은 친오빠 빼곤 없는 편이다. 이 점은 아쉽지만, 인터넷에는 아직도 <슬램덩크>를 앓는 무수한 팬들이 있으니 괜찮다.
나의 최애는 서태웅->채치수->안경선배 순으로 바뀌었다. 나이가 들수록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가 변화했기 때문이리라. 서태웅의 쿨하고 멋진 면모에 반했다가, 채치수의 노력과 재능에 반했다가, 안경선배(a.k.a. 권준호)의 꾸준함에 반하고 만 것이다.
백호도 좋아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백호에게 자격지심을 느꼈다. 백호는 몇 개월 만에 북산의 핵심 선수로 성장해 없어서는 안 될 인재가 되었다. 나는 저걸 보고 있었을 수많은 농구 꿈나무들에 빙의하여, 그들이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꼈을지 걱정하곤 했다. 운동이나 예술은 사랑만 하기에는 너무 빛나고 재밌어 보여서 나도 저들 틈에 껴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저절로 들곤 하는데, 비극은 재능 없이 사랑만 하는 이들에게서 자주 일어난다. 평생 재능을 짝사랑해왔던 내 입장에서는 백호를 보면서 도저히 마음 넓게 웃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항상 내 마음은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 여전히 농구를 사랑하는 신발가게 사장님 같은 사람들에게 향하곤 했다. 만화책 뒤편에서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사람들. 스포트라이트가 없어도 묵묵하게 할 일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현재 내 최애는 양호열이다.
양호열에 대해 말하자면 백호의 친한 친구이자, 백호군단의 2인자 그리고 강백호라는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나는 양호열을 보면서 영화 <굿 윌 헌팅>의 처키 슐리반(벤 애플렉)을 떠올리곤 한다. 처키는 친구인 윌 헌팅(맷 데이먼)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의 방식으로 친구를 응원한다.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치고,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게 일상이었던 그들에게 변화가 찾아온다. 윌의 잠재성을 알아본 대학 교수 덕분에 심리 치료를 받게 되어 조금씩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가던 윌은, 처키가 어느 순간 내뱉었던 대로 안녕이란 말도, 어떠한 작별의 말도 없이 사라진다. 처키는 문을 두드려도 대답 없는 윌의 집 문을 등지며 웃는다. 친구가 떠났음을 직감한 것이다.
양호열은 사랑하는 친구를 농구에게 빼앗겼지만, 기꺼이 '강백호의 농구'를 위해 싸우고, 맞고, 누명을 입는다. 강백호는 몇 개월 남짓 첫사랑처럼 뜨겁게 농구를 사랑한 탓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아마 양호열은 그걸로 백호를 나무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백호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다 주고, 재활운동을 하는 백호를 가끔 만나며 친구들 소식을 전해줬을 것이다. 나는 백호에게 귀인이 하나 있다면, 채치수도 안 감독도 아닌 양호열이라고 믿는다. 선배는 후배를 가르쳐줄 수 있고, 감독은 선수를 이끌어 줄 수 있지만, 친구가 내 일에 진심으로 함께 해주는 건 앞의 두 가지 일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백호가 농구를 좋아하는 만큼, 글을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백호가 아무리 천재였어도, 그 정도의 사랑이라면 나도 못 할 건 없었을 텐데...
아쉽지만 그렇다. 하지만 이제 예전만큼 슬프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강백호를 꿈꾸는 안경선배, 아니 어쩌면 만화에 나온 적도 없는 하나의 엑스트라일지도..
그래도 여전히, 여전히 나는... 글 쓰는 것만큼 잘하고 싶은 건 없다. 정말 좋아한다. 거짓말 아니고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