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농의 아들인 "나"에게 "점순"이가 삶은 감자도 쥐어주면서 호의를 베푼다. 이상하게도, 점순이는 어느 날부터 "나"의 수탉과 점순네 닭의 싸움을 자꾸 붙인다. 우리집 닭은 싸움에서 늘 지는데 계속해서 싸움을 붙이는 점순이가 원망스럽던 나는, 어느 날 너무 화가 나서 점순네 닭을 때려죽인다.
아들은 호의를 베푼 사람네 닭을 왜 죽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더 읽을 필요도 없다며 책을 집어던지는 시늉까지 한다.
한국 나이로는 6학년이고, 국제 학교를 다니닌 이제 곧 8학년에 들어가는 만 12살의 아이. 목소리도 변성기로 조금씩 변하고 있고 인중에 까뭇까뭇한 수염도 날락말락 한다. 내가 조금만 잔소리를 하면 더 큰 소리로 받아쳐서 사춘기의 초입인가.. 하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미묘한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는 가보다.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점순이가 나를 좋아해서 관심을 끌려고 감자도 주고 닭싸움도 자꾸 붙인 것 같지 않니?"
"아니야. 뭘 좋아해? 거기 그렇게 써있지도 않아."
"안 써있어도 실은 좋아하니까 자꾸 관심을 받으려고 하는 거잖아."
"그렇다고 닭을 왜 죽여? 호의를 베푼 사람네 닭을 죽이는 게 뭐가 괜찮아?!! 이거 줄거리 이상해. 안 할거야."
문제집을 더 이상 풀지 않으려는 속셈인지는 몰라도, 사뭇 진지했다. 몇 번 얘기해도 이런 감정에 대해 전혀 모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닭을 죽이는 것은 이상하다는 것이다.
읽으면 느껴지는 풋풋한 감정들의 파도인 것을. 왜 선악 구도로 몰아가니 아들아… 한숨을 푹 쉬면서 남편한테 카톡을 보낸다. 아들에게 소설을 더 읽혀야 한다고 헛된 망상도 발설해봤다. 당분간은 절대 안 읽을 아이이니까 망상임에 틀림없다. 여전히 답답해서 동네 유러피안 친구한테 김유정 동백꽃 줄거리까지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아들이 감정선을 읽지 못하는 것인가 한탄하며, 너희 아들도 그러니? 하면서 위안을 구하기도 했다.
남편의 해설은 간명했다. 아직 아들은 이성에게 관심을 주고 받는 것을 모르는 단계라는 것이다. 아직 모른다는 것을 엄마가 인지하고 있으면 된다고 한다.
내가 그 상태를 아는 것은 필요하지만 중요하진 않다. 이해가 안 돼도 소설을 읽어보려는 노력은 조금이라도 하게 해야 할텐데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남편은 그런 건 개의치 않는다. 그저 아이의 현재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한다. 아차, 나는 이상주의자와 결혼해서 아이 둘을 키우고 있지.
유럽 친구는 나의 동백꽃 줄거리 설명이 불충해서 그런지, 엉뚱한 걸 묻는다. 지금 방학인데 아들은 공부를 하는 것이냐? (유럽 아이들은 대부분 9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한다고 한다), 그런 책은 어디서 갖고 왔냐? (한국 갔을 때 워크북을 준비해왔다고 했더니, 너 그런 앤지 몰랐다는 마냥 눈이 커진다), 아직 어린 남자애들한테는 연애 감정보다는 닭을 죽이는 것이 더 크게 다가올 수도 있다. 뭐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한참 하소연을 하고 났더니, 다른 생각이 든다.
며칠 전, 미테랑 도서관에서 직지심체요절을 관람하고 왔다. 세계 최초 금속 활자로 찍어낸 책이고, 구텐베르크보다도 수십 년이 앞선 기술로 만들어낸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보물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 보존되지 못하고, 프랑스 공사가 병인양요 때 골동품상에게 단돈 70만원에 사들여 프랑스로 건너오게 된다.
70년대 초 전시가 된 이후 50여년 만의 전시라고 하여 부랴부랴 갔었다.
어떻게 직지심체요절을 전시하고 있을까.
유리상자 안에 고이 놓인 책의 한 부분이 펼쳐져 있었는데, 고려 시대 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보존에 놀랐고, 구절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바로 "선악불이 (善惡不異)". 선과 악은 모두 인연에 의해 생긴 것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는 평등 무차별한 하나의 이치로 돌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아들, 네가 문제집을 풀기 싫어서 애꿎은 닭 탓을 했을 수도 있지. 엄마는 그걸 악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잠시의 행복을 얻은 너는 스스로에게 선을 행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네가 진심으로 점순이네 닭을 때려 죽인 것에 대해서 이해를 못했다고도 생각한다. 소설 속 “나”는 “나”를 좋아하는 점순이의 선한 마음을 모르고 자꾸 닭싸움을 붙이는 사실에만 집중해서 점순이를 악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애꿎은 닭에게 복수를 한 것이지.
하지만, 점순이는 사랑이라는 큰 마음 아래, 악을 악으로 접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닭을 죽인 그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고 동백꽃 사이로 같이 파묻히며 쓰러졌으니 말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그 마음을 표현하고 쟁취하려는 노력에, 선과 악의 구분이 의미가 없는 하나의 이치(사랑)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한국 근대 소설을 깊게 사랑했고 수많은 소설을 읽었던 국문학도 출신인 엄마는,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는 이 서사에 대한 너의 문제제기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처음엔 답답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호의를 베푼 사람의 닭을 죽이는 것이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어" 하는 너의 말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너의 말이 일견 맞다. 그런데, 언제 괜찮아지는 줄 아니?
선악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거나 선과 악의 경계가 아닌 상태로 넘어가면. 괜찮아지는 것이더구나. 덕분에, 오늘 또 하나 깨우쳤다. 고맙다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