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살짝 귀찮기도 하고, 일주일치 필요한 것만 딱 사서 먹고 또 신선한 것을 사는 일과가 막 좋아진터라, 명함을 두고 가라고 했다.
"아.. 우리는 여길 1년에 3번 와서, 명함을 두고 가도 소용이 없어요. 시간되면 잠시 나와서 구경해도 괜찮아요"
그래, 구경이나 해보자. 지난 번에 왔던 청년 농부들의 제안은 바쁘다고 거절했었는데, 오늘은 햇살도 좋고 긴 회의를 막 끝내 마침 신선한 공기도 필요한 때였다. 지붕이 높은 대형 승합차에 과일과 야채가 칸칸이 쌓여 있었다. 나무 상자에 칼을 거꾸로 꽂아놨었는데, 갑자기 칼을 쑥 뽑더니 사과 조각을 잘라 먹어보라고 건넨다. 사과의 향이 이렇게 진했나 싶을 정도로 신선함이 느껴졌다.
저렇게 큰 박스로 사면 무른 것들도 나타나고, 일부는 못 먹고 버리겠지. 많이 버리게 될 수도 있어. 게다가 모든 사과가 다 이렇게 맛있지는 않을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냐고 물었다. 사과는 1kg에 3.95유로라고 했다. 17kg, 34kg, 51kg, 68kg 이런 단위로 판다고 했다. 34kg를 사면 사과만 19만원 어치 사는 것이다.
너무 많은데? 눈이 동그래진 동양 여자에게 농부는 이런 제안을 한다.
어둡고 서늘한 곳에 두면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저장하면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4인 가족이 일주일에 2개씩 먹으면 17kg, 매일 2개씩 먹으면 34kg를 사면 된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 1개씩의 사과를 먹을지, 더 먹을지, 안 먹을지 모른다. 그래도 이런 생산자 중심의 (일단 사서 잡숴라, 거의 매일) 접근법에 이상하게 정감이 갔다. 일년 농사를 열심히 일궈 수확을 하고 큰 차에 싣고 노르망디에서 파리 인근까지 와서 팔다니. 금액을 듣고 나니 이거 다 팔고 돌아가도 차비하고 점심 먹으면 크게 남는 장사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더 사주고 싶었다.
마침 갖고 있던 현금이 40유로 밖에 없어 10kg만 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선뜻 된다고 한다. 거스름돈이 없다길래, 거스름돈은 됐으니 당근을 서비스로 달라고 했더니, 흙이 묻은 막 뽑은 듯한 당근 4개를 사과 위에 툭 얹어서 집 안까지 가져다 준다.
서울에도 트럭 아저씨들은 있었다. 생선, 젓갈, 화분, 야채 아저씨들이 기억난다. 확성기 소리가 나면 부리나케 나가봤던 기억도 난다. 근데 나가면 아저씨들은 이미 가고 없을 때가 많았다. 빨리 사고, 안 살거면 본인은 빨리 이동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도 같이 기억난다. 빨리빨리 문화는 삼천리 방방곡곡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오늘 청년들은 집집마다 벨을 누르고, 살 생각 없는 표정을 하고 있어도 한 마디라도 더 대화를 유도했다.
웃는 얼굴로 자꾸 말을 거는 동시에, 사과 향은 좋고 맛보기 사과는 아삭아삭 맛있다.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에 대한 스토리텔링, 대량 판매에 대비한 세심한 저장방법과 유통기한까지.
작은 것부터 제안해서 경계심을 낮추고, 조금 더 큰 요구사항이나 조건을 제시하는 것.
foot in the door technique. 문 간에 발 들여놓기 기법이다.
알면서 당한 게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뒤적뒤적 상자 아래까지 살펴보니 과육이 단단하고 빨갛게 잘 익은 사과가 꽤 많았다. 사과사러 노르망디까지 갈 일은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청년 농부들의 정성에 힘을 보태고 싶었다. 그러니 절로 내 기분도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