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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팰롱팰롱 Jul 28. 2020

호주가 나에게 준 가르침

인생에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은 없더라.

나는 겁쟁이였다. 나를 가둬놓고 못살게 굴면서 세상 밖으로 뛰쳐나갈 생각조차 못 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 만족했고 도시 내 다른 지역을 방문하는 것도 꺼렸다.

인생이 살얼음판과 같았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팽팽하게 당기고 있었다. 언젠가는 끊어질 것 같은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나 워킹홀리데이 갈래!”

그런 내가 어느 날 공언했다. 엄마가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한 유럽 여행이 화근이었다. 엄마는 내가 살던 세상을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빠를 구슬려서 비싼 돈까지 대어가며 나를 설득해  유럽이라는 세상을 보여주었다. 여행하는 동안 또 돌아와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했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어느 날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지며 나를 엉뚱한 곳으로 튕겨냈다. 그게 바로 워킹홀리데이였다. 당장에 떠날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호주가 만만했다. 많이 가기도 했고 비자 받기도 비교적 쉬웠다. 하지만 모아 놓은 돈이 없었다. 부모님의 원조가 필요했다. 나름 가서 어학연수를 하고 영주권을 받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장황설을 늘어놓았다. 그렇지만 내심 나는 난 그냥 이 모든 것에게서 떠나 있을 곳이 필요해요. 미안해요. 엄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20일 만에 살던 집도 내팽개치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도망치듯 호주로 갔다. 무식하면 용감하던가. 호주로 가는 길에 경유했던 창이 공항에서 나는 내 생애 제일 공포스러웠던 2시간을 보냈다. 공항은 너무 컸고 나는 영어를 단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유학원에서 알려준 대로 전광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지만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누가 말을 시키는데 어디 가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 항공권을 보여주었다. 어디로 대충 가라는 것 같아서 가긴 했는데 너무나 무섭고 혼란스러웠다.

 ‘그 사람 제대로 알고 있는 건 맞겠지? 보딩 타임 이란 건 뭐야? 비행기가 뜨는 시각이란 건가? 근데 왜 게이트에서 보여주는 시간이랑 내 티켓에 적힌 시간은 다른 거지? 비행기를 놓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국제 미아 되는 건가? 집에는 갈 수 있는 건가? 아… 벌써 한국 보고 싶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은 거 맞지?'

진짜 누가 내 인생에서 제일 무서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나는 그때라고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수 있다.

다행히 다음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호주 공항에 도착해서 홈스테이 맘의 마중을 받아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얏호, 호주 생활 시작이닷! 이제 영어를 배우면 청산유수로 현지인들과도 떠들고 생활은 마냥 여유롭고 평화로워지겠지? 그러나 그건 아주 크나큰 내 착각이었다. 인생에서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고 내 손에 거저 쥐어지는 것은 없더라.


당장 영어가 문제였다. 괜찮았다. 난 어차피 영어를 잘하려고 온 것은 아니니까...?? 라며 일 보 후퇴했다. 문제는 사람들의 무시였다. 영어를 못 한다는 단순히 그 이유 하나로 난생처음 받는 종류의 무시는 나에게는 무척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생각했던 생활은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호주 사람들은 이게 아니었는데. 영어만 잘하면 이딴 무시 이딴 푸대접받을 일도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니까 오기가 생겼다. 쟤도 하고 쟤도 하는 영어를 왜 나만 못하지? 하는 생각도 한 몫했다. 그래서 과외를 시작했다. 내 오지게 하는 영어 공부의 서막이었다. 죽자 살자 공부했다. 현재 완료형이 무엇인지 현재형과는 무엇이 다른 건지 차근차근 배워 나갔다.

낯선 땅에서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영어를 못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죄다 몸만 쓰고 말은 필요 없는 그런 일들이었다. 경기장 청소, 하우스키핑, 오피스 청소. 한국에서라면 생각도 안 해 봤을 그런 일들을 했다. 난생처음 몸으로 하는 일을 해서 손목터널 증후군이라는 것도 경험했다. 밤마다 팔 전체가 불에 타는 것 같은 극한의 고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던가 아니면 몸이 알아서 적응하는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하루는 이가 너무 아팠다.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치통이 왜 극심한 고통 중에 하나라는지 몸소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병원에 가기도 무서웠다. 일상 영어도 이제 겨우 조금 되는 마당에 병원이라니. 언감생심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치과를 찾았다. 오 하느님. 다행히 치과에 한인 위생사가있었다. 썩은 내 사랑니에 음식이 꼈고 그게 더 썩게 만드는 악순환을 해서 그런 거라고 발치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2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해결할 걸 왜 치과 검진도 안 하고 왔냐고 핀잔을 들어 먹고 거금을 들여 사랑니를 뽑았다.


하지만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힘들었던 만큼 좋았던 추억도 많다. 그래서 호주를 생각하면 양가적 감정이 떠오른다. 나빴지만 좋았다. 어학원을 마치고 애들과 함께 곧장 바다로 달려가서 입던 옷 그대로 놀았던 기억, 옷을 말려야 집에 갈 수 있으니까 즉석에서 고기 사다가 강렬한 태양 아래서 바비큐 해 먹으며 옷을 말렸던 기억. 일은 고됐지만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동료들과의 추억, 아름다웠던 서호주로의 여행. 하늘에서 쏟아지던 별들. 장엄한 풍경. 파도 타고 놀던 돌고래들. 아름다웠던 사람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감정도 쓰지 않고 오로지 ‘힐링'만 하겠노라 마음먹고 간 곳이었건만 나는 단지 그곳에 ‘있기만’ 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고 엄청난 감정을 소모해야 했다. 하지만 비워 낸 만큼 담아서 돌아올 수도 있었다. 호주에게서 나는 어떤 일이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 비운만큼 새로운 것들로 채울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면 고톻스럽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며 엄청난 감정과 에너지를 쏟아내기도 해야 하며 이전에는 겪어 본 적 없었던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관계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결론은 그것들이 반짝반짝 빛나며 내 인생 한 자락을 장식하며 나를 더욱 나은 사람으로 인도해 준다는 값진 가르침을 얻었다.  그것이 비록 나만 아는 경험이라 할지라도. 계획대로 흘러간 1년은 아니었지만, 호주에서의 경험은 내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준 귀중한 경험이었다. 

내가 찐힐링을 했던 코테슬로 비치. 조커로 유명한 배우 히스 레저가 사랑했던 비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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