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머리 짐승 May 09. 2020

시작‘한‘ 자의 하루

   

"다만 만나러 간다. 만나서 그다음에 어떻게 할 건지는 사실 루 자신도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2019>


      시작의 마음은 설렌다. 시작의 몸짓은 활기차며, 시작하는 이는 응원받는다. 교복과 신학기 아카데미 노트북 광고는 그렇게 말한다. 세월이 한참 흐를 때까지 사실, 시작’하는’ 것은 없다. 대개 시작은, 된다. 되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 손이 건넨 숟가락을 내 손이 쥐고 밥 먹기가 시작되고, 취학 통지서에 내 이름이 인쇄되면 등교가 시작된다. 진학이 계속되다 백에 다섯쯤은 취업’하지만’ 마흔다섯쯤은 취업’되고’ 나머지 쉰은 취업되기를 기약 없이 기다린다. 시작 뒤에 붙는 어미는 사동형이 숨은 피동형이다. 시작시켜 시작된, 대강 이런 느낌. 어느 시작은 화려하지 않고 대단하지도 않다. 설렘과 활기는 얼떨결에 받을 응원에 대비한 방어기제 인지도 모른다.


    마흔 즈음에 처음으로 시작했다’. ‘처음 ‘시작 결이 함께 쓰면 군더더기다. 기억을 더듬고 파내면 스스로 시작한 일이  없겠냐마는 삶의 변곡점으로 작용하거나 얕은 주름이라도 남길 일은, 없었다. 또한 나이를 굳이 밝히는  늦음을 강조하여 동정을 얻으려는  아니다. 마지막일 수도 있는 절박함의 혼잣말이다. 시작시작은 설렘도 활기도 없었으며  시작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축하해대신 ‘대단해세례를 이어갔다. 응원이라기보다 기원에 가까웠다. ‘부디 후회 없기를


알람이 울리는 05:00

    시작한 일은 글 써서 밥 벌기다. 출간 작가의 타이틀을 드디어 얻었지만 챙겨 먹여야 할 입이 내 것뿐이 아니라 무겁다. 길러내야 할 두 어린 입에게는 노력의 과정이 결과를 앞서야 한다 가르치면서도 정작 나는 빨리 나의 결과를 보고 싶어 안달한 나머지, 문장은 고사하고 생각조차 덜 다듬은 글들을 내지른다. 약아빠진 조사와 어미, 구두점들이 날카로운 관찰, 집요한 고민을 대신한다. 이렇게 버티면 어디선가 누군가 나타나 내질러진 글들 가운데 하나를 건져 전체를 예쁘게 포장해 주지 않을까, 바란다. 작가로서 눈에 띄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본말이 전도된다. 잠이 달아난지 오래지만 다시 커피를 내리러 간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09:00

    2년 전쯤 첫 출판의 희망을 주었던 출판업자가 어느 베스트셀러 에세이스트의 이야기를 빗대 끝내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이의 롱런은 인스타그램 이미지와 팔로워 숫자 때문이라고. 알면서도, 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출판한다고. 출판사 또한 기업이므로 책이 팔리지 않을 위험은 질 수 없다는 자조 섞인 고백이었다. 잘 팔리는 글쟁이가 되려면 우선 스스로를 유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시대란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팟캐스트를 기웃거린다. 단지 내 팔로워를 늘리기 위해 하트를 남발하다 급기야 네이버에 ‘인스타 팔로우 늘리는 법’을 검색하니 예상치도 못했던 대행업체란 것들도 있다. 게다가 수두룩하다. 뭐하는 짓인가 싶다. 그곳들의 문법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작가가 되는 문법이 복잡해진다. 구병모의 소설을 읽는다. 한 시간 전에 돌려놓은 세탁기 종료 벨이 울린다. 아내에게 퇴근 전화를 받는다.


설거지를 끝낸 20:00

    내 또 다른 직업은 전업주부다. 그러고 보니 전업이 두 개다. 하나는 오로지 전 자를 쓰는 전업(專業), 다른 하나는 구를 전의 전업(轉業)인데 어느 직업에 어느 한자를 붙여야 하는지는 때마다 다르다. 아내가 퇴근한 뒤부터는 오로지 전, 전업작가다. 다시 책상에 앉는다. 아내가 나를 지켜본다. 정말 지켜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 글을 쓰겠다고 선언한 뒤부터 아내는 말을 아낀다. 부담 주지 않으려는 속은 알지만 그 속이 속이 아닌 것 또한 짐작한다. 그런 아내의 마음을 문장으로 이어가면, 마침내 소설로 써내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눈과 귀가 멈추는 표정, 움직임, 장면 따위를 하나같이 문장으로, 이야기로 둔갑시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해 커피 한 잔 올려놓고 늦은 밤 다시 글을 쓴다. 그 늦은 밤이 되어서야 계속 써야만 하는 이유를 깨닫는다. 다시 조바심 나는 새벽이 찾아올 테지만 오늘 밤은 써야만 한다.


    나는 매일 시작하고 또 시작한다. 설렐 일도, 활기에 몸부림칠 일도, 응원받을 일도 없다. 다만 쓰러 간다. 써서 그다음에 어떻게 할 건지는 사실 나 자신도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keywor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