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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머리 짐승 May 15. 2020

친구


친구 이야기를 쓴 적이 없는가 봐요. 수시로 생각날 만큼 친구가 많지는 않아 그랬을까요? 어렸을 적엔(또는 젊었을 적엔) 친구 많은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어요. 녀석도 알고 저도 아는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한참 뒤에나 듣게 되면, 누군가 “아, 넌 그때 없었나?” 하며 지들끼리 즐거웠던 한때를 떠들거나 급하게 숨기면, ‘나는 왜 친구가 없을까’와 ‘누구처럼 차고 넘치지 않을까’ 사이 어중간한 지점에서 스스로를 탓했던 때가 있었어요. 다 ‘라떼’ 시절이죠. 제겐 많은 친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음지에서 은밀히 작동했던 학연, 지연 따위가 인맥, 네트워크로 둔갑하여 양지에서 각광받는 아직도 외롭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다만…


2001년

    “안녕하세요, 혹시 한국 사람……”

    “네”

그런가 보다 했다. 낡은 유니폼을 입고 맨 뒷줄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던 녀석이 나와 동갑이며 곧 친구가 되리라는 걸 그 날은 몰랐다.


200X 년

    “나 미국 가. 너네 와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 가”

아마 한동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었다. 멀리 보내는 아쉬움에 하루가 멀다 하고 자주 만나는  또한 없을 터였다. 여름밤, 배기량조차 모르는, 분명 적정 탑승 인원이 셋은 아닌 스쿠터에, 셋을 얹고 한강 공원으로 달렸다.  , 그곳이 세상 끝인 것처럼 질러댔다. 만약 경찰이 출동했다면 녀석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몇 년 뒤 여전히 200X 년

    “오랜만이다. 살아 있었냐?

    “어디 좀 잠깐 갔다 왔다”

    “어디”

일 년만의 통화였다. 살아 있었냐는 물음은 그저 ‘오랜만이다’의 강조일 뿐 애절함 따위는 없었다. 녀석이 지난 6개월 동안 사지(死地)에 있었다는 걸 “어디” 뒤의 짧은 대답을 통해 전해 들었다. “살아 있었냐”에 힘을 실었어야 했다. 여섯 달 만에 살아 돌아와 놓고 그걸 ‘어디’와 ‘잠깐’으로 갈음하는 녀석의 간결한 표현력에 감탄했다.


2017년 2월

    “골랐냐?,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뭐 다 똑같고만. 대충 아무 거나 사면 안 되냐?”

관심 없는 동반 고객을 위한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녀석들이 물었다.

    “응”

    “가자”

“응” 과 “가자” 사이 5초도 안 되는 찰나에 놈들은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계산대로 달렸다.

    “뭐야, 왜 이걸 너희가 사?”

    “그냥, 써. 밥 먹으러 가자”

녀석들이 내게 사준 건 지갑이었다. 카드 지갑, 아니 스마트폰 하나면 불편 없는 초간단 결제의 시대에 굳이 동전까지 넣을 수 있는 말 엉덩이 가죽 지갑을 사겠다는 나를 따라 숙소에서 30분이나 떨어진 곳까지 걸어왔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녀석들은 그렇게 곰살맞은 캐릭터가 아니다. 초밥 우동 세트를 시켜놓고 나는 다시 물었다.

    “근데 이거 왜 사준 거냐?”

    “이별 선물이야, 야, 밥 나왔다”

씹어 삼키느라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석 달 뒤 런던으로 이사했다. 마주 앉아 참치 초밥을 물 마시듯 넘기던 놈은 2년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바꾼 적 없는 그 두껍고 무거운 지갑은 아직도 해진 곳 한 군데 없다.


2018년 12월, 녀석이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크리스마스

   “아, 참. 나 미국 교육 마치고 다음엔 독일로 가 볼까 싶다”    

    “오면야 나는 좋지만 그게 돼? (안 될 거야, 아마)”

‘올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와 ‘온다면 말이 안 된다’ 사이 나의 예감은, 세 가족 열한 명이 함께 보낸 그 날과 같은 날은 다시없으리란 확신과 비슷한 무게로, 말이 안 된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2020년 2월

    “올여름 독일에서 만납시다”

다음 발령지는 독일이라 했다. 카카오톡 채팅을 이어가면서 거실에 있던 아내에게 소리쳤다.

    “발령 났대!”

    “진짜? 진짜?”

아내는 아마 바로 8인실 에어비엔비, 그러니까 우리 가족과 녀석 가족이 함께 묵을 수 있는 여름 휴가지를 검색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바빠질 것이다. 녀석과 가족들이 공항에 도착하기 전날 세차장에도 가야 하고, 당장 먹을 간편한 한국 음식을 미리 주문해 상하지 않게 포장해 차에 실어 놓아야 할 것이다. 아이들 침대 밑 매트리스도 꺼내 깨끗하게 해 놓고 2층 거실도 청소해 놓을 것이다. 2020년 7월을 그렇게 맞이할 것이다.


일주일 전 녀석으로부터 연락을 받지 않았다면 올해 여름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2020년 5월, 일주일 전 금요일 자정

    “안 자면 전화 좀 걸어 봐.”

페이스북에 그 날 쓴 글을 포스팅하고 막 자려는데 카카오톡이 왔다. 느낌이 좋지 않다.

    “야, 하, 나 참. 독일 못 가. 다른 데로 가래”

잠자리로 가야 했던 나는 다른 데로 가 한참 동안 잠들지 못했다. 아내가 검색했을 여행지는커녕 미리 사놓으려 했던 곱창과 맥주는 결제 예정 내역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곱창도 맥주도 잘 먹지 않는다.




… 다만 친구가 많지 않으며 많은 친구가 필요하지도 않은 제게도 이런 친구가 있습니다. 두 가족 가운데 하나가 독일을 떠나는 날까지 웬만한 주말은 비워 놨을 겁니다. 어쩌면 저희 집 칫솔은 한동안 여덟 개였을지도 모르죠.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올여름이 거품처럼 부서집니다. 2018년 크리스마스이브, 억지로라도 ‘올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 쪽으로 생각을 기울였어야 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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