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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머리 짐승 May 23. 2020

부부의 세계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화제였던 모양입니다. 부부의 부정과 회한기(悔恨記)는 재벌가 숨겨진 자식의 복수 성공기, 불량배의 정의 사도 변천사만큼 흔합니다. 악랄했던 깡패는 계도되어야, 해 드실 만큼 해 드신 재벌은 내려놓아야 보는 사람이 마음 편한 건 알겠는데, 한때 날 설레게 했던 배우자의 배신이 단골 소재로 쓰이는 건 불편할 때가 있어요.


오전에는 아내에게 원격 화상 회의가 많습니다. 아내가 아침 설거지를 하는 동안 저는 아이들 온라인 수업 내용을 화이트보드에 적어 놓고 아이들에게 브리핑합니다. 아이들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거실을 청소한 , 아내가 서재로 올라가기  내려놓은 커피를 들고 식탁에 앉아 작은 아이 온라인 수업을 돕습니다. 틈날 때는 간밤에 오줌  아이 이불과 시트를 빨아 널고 점심 재료를 준비하죠. 11 30, 아내가 내려오면 아이들이 스스로 오전에 받았던 수업 내용을 엄마, 아빠에게 얘기하고 부부는 질문합니다. 제가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아내는 오후에 챙겨야  아이들 일과를 훑어봅니다. 점심을 먹은  오후에는 제가 서재로 올라가요. 아내는 식탁에서 일하며 악기 레슨, 독일어 수업 시간을 체크해 아이들에게 알려줍니다. 아이들이 들락날락하며  앞에서 뛰어노는 소리가 들립니다. 다섯 시부터 부부는 저녁을 함께 준비하죠. 노트북 가방을 정리한  거실로 내려가는 길에 보니 아침에 널어  시트와 이불도 벌써 말라 말끔히 입혀져 있군요. 저녁 여덟 시가 되면  가운데 하나가 물을 겁니다. “어떤  마실래?”


해가 길어진 저녁 네 식구가 복작거렸던 하루를 마감하는 산책을 나갑니다. 바람과 볕이 적절히 조화된 저녁 산책길은 부부가 걷는 데 안성맞춤이죠. 한데 문제는, 시원하면서도 따스한 그 시간이 아이들에겐 뛰어다니기 안성맞춤인 시간이란 점입니다. 숲 길바닥을 짚는 건 예삿일이고, 그 흙 묻은 손바닥으로 굳이 뺨을 비벼 흘러내린 땀과 섞어버리니, 그 면상이 꼭 고개 파묻고 짜장면 먹은 듯 얼룩덜룩합니다. 집 앞, 모래와 낙엽 파편으로 서걱거리는 신발을 던지듯 벗어 놓고 집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아이들 뒤꽁무니에 대고 “손부터 씻어”를 외칩니다. 아직 복작거림은 끝나지 않았나 봐요. 아내는 주방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시작합니다. 그동안 저는 아이들을 목욕시키죠. 산책하기 전 개어두기만 했던 빨래를 정리하는데 이는 수세미와 목욕타월, 둘 가운데 하나를 더 빨리 놓는 자의 몫입니다. 빨래 정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 방마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이부자리를 매만져 잘 준비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어떤 차 마실래?” 부부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말끔한 거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지난 두 달 아내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각자에게만 속한 일과 둘 모두에게 속한 일을 매끈하게 이어왔습니다. 집안에서 해야 하는 모든 어른의 일들을 부부 각자는 모두 할 줄 압니다. 네가 더 잘하는 일, 내가 더 빠르고 꼼꼼한 일은 있을지언정 역할을 나누지는 않습니다. 그저 지금 서로가 무슨 일에 뛰어들어야 저녁 여덟 시쯤 상대에게 “어떤 차 마실래?”를 여유롭게 물을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지금쯤 되어 있어야 하는데 제가 하지 않은 일들은 어느새 되어 있습니다.


부부 사이 믿음이란  가슴속에 오로지 상대만을 넣어두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을 겁니다. 서로의 부족을 채우라는 주례사 단골 명령도 부부 사이 믿음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조금  즐거운 저녁, 그저 조금  산뜻한 아침을 함께 맞이하기 위해 지금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을, 서툴지언정 내가   부부의 세계는 지금과 같이 풍요로울 겁니다. 그래서 화제작 ‘부부의 세계 제게 화제를 불러오지 못합니다.


며칠 전 아내가 물었습니다. “이 참에 우리 같이 뭐 해 볼까?” COVID19가 저희 부부에게 준 가장 가치 있는 깨달음입니다. 자랑임을 최대한 숨기려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지난 두 달 부부의 동선을 그려보면 떠오르는 음악이 한 곡 있습니다.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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