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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머리 짐승 May 26. 2020

반찬

“그럼 요리도 직접 하세요?” 아주머니들에게 심심찮게 받는 질문입니다. 특별한 이미지가 없던 요리사가 어깨 넓고 하완 근육이 발달한 투블럭 ‘셰프’로 변모하면서, 칼질에 프라이팬 돌리는 남자 그림을 그럭저럭 아이들 돌보고 청소기와 세탁기 돌리는 아저씨 모습과 겹치기 쉽지 않은가 봐요.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해요. “요리는 잘 모르겠고 밥은 합니다” 엄마가 동네 친구들과 헤어질 때 돌아서며 건네는 인사말, “오늘 저녁은 또 뭐 해 먹냐” 의 느낌을 살려서. 


처음에는 제가 대견했어요. 고깃덩어리, 풀때기에 물과 불을 더해 여차저차, 이리저리, 휘휘 섞어 접시에 담아낸 음식이 아내와 아이들 입으로 들어갈 때, 그 입들이 “와, 맛있다” 할 때, 이 참에 똑떨어지는 앞치마와 차지게 벼린 중식도를 살까 했었어요. 신입사원이 반 평에도 못 미치는 자기 책상을 처음 받았을 때 세상 가장 폼나는 워크 스테이션을 꿈꾸는 마음으로 말이죠. 그때는 요리도 하냐는 물음에 살짝 웃어 보이며 “네, 해요” 했나 봐요. 그랬을 거예요.


네, 영국에서 주로 만들었던 서양 음식은 접시 단위예요. 접시 하나에 한 사람이 한 끼 먹을 음식을 모두 담아내죠. 한 번의 조리 과정은 대개 한 끼 수명을 가져요. 남은 걸 보관했다 다음 끼니에 먹는 일은 가끔 있지만 만들 때부터 두고 먹을 걸 염두에 두지는 않죠. 서양 음식은, 즉 완료형이에요. 일단 접시에 담긴 음식은 그 형태와 맛 그대로 섭취되거나 끝끝내 남으면 버려져야 합니다. 먹는 자의 관점에선 그러하고 만드는 자 입장에서 완료형 음식이란 매끼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와 같아요. 영국에서 독일로 이사 오면서, 그러니까 대략 2년 차를 넘어서니 신입사원의 패기는 사그라들었습니다. 매 끼니 0부터 시작하는 일에 지쳐갔지요. 글쓰기와 살림, 전업이 둘이다 보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 무렵 가장 즐겨 만들었던 밥은 소고기 뭇국과 카레예요. 그 두 가지 음식은 덥힐수록 맛이 깊어지고 김치만 썰어 놓으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하며 조리 과정이 간단하다는 공통점이 있거든요. 서양 음식에서 우리 음식으로의 태세 전환을 위한 – 카레는 물론 인도 태생이지만 오뚜기 분말은 우리 음식이라 생각합니다! – 일종의 과도기였어요. 


과도기를 거쳐 요즘 저희 집에서 유행하는 음식은 나물입니다. 독일 땅에서 달래, 취, 냉이와 같은 봄나물이야 언감생심이지만 시금치, 고사리, 호박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어요. 일요일이면 다음 주 금요일까지 먹을(수 있을 것 같았는데 수요일이면 동나는) 나물 몇 가지를 만듭니다. 밥만 해 놓으면 차려내기 그만큼 편한 찬거리가 없어요. 보관용 유리 용기째 놓고 먹어도 되고, 참기름, 고추장, 달걀 프라이와 함께 대강 비벼 먹어도 되며, 김밥 재료로 넣어도 되죠. 그런 면에서 밥과 반찬이 따로 있는 우리 음식은 완성형 서양 음식과 다른 오픈형이에요. 완성된 한 가지 음식이 여러 형태로 재조리, 재조합되어 다양한 풍미를 내죠. 외국인들에게 한국 음식 하면 떠올리는 “풀코기”만 해도 당면만 삶아 다시 볶으면 잡채요, 콩나물 씻어 두부와 함께 고추장에 자작하게 끓여내면 두루치기가 돼요. “킴치”의 응용 범위는 말할 나위가 없지요.


외국에 살다 보면 속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좋은 머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어찌 되었든 음식 문화만 봐도 그래요. 외국인들에게 우리 음식 문화를 소개할 때 반찬을 표현할 말이 적당치 않아 Side dish라 해왔어요. “우린 밥을 주식(Main dish)으로 하고 반찬(Side dish)을 곁들여 먹는다” 식으로요. 쌀이 주식이라 배워왔지만 가만히 따져보니 반찬을 먹기 위해 밥을 먹지, 밥을 먹기 위해 반찬을 먹는 건 아니었어요. 우리 음식 문화에 Main과 Side의 틀을 씌우기는 어폐가 있어요. 그 하나하나의 맛도 나무랄 데 없지만 무한히 변신하는 우리 음식, 서울을 떠난 뒤에야 그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우리 음식 문화를 소개할 다른 문장들을 생각해봐야겠어요. 무엇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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