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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쥐마담 Dec 15. 2023

12. 너의 잘못이 아니야

암에 대해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으면 그다음은 일사천리다. 요즘처럼 정보와 자료가 널린 세상에서는 검색 몇 번으로 못 알아낼 지식이 거의 없다. 매체에 따라 정보의 특성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세는 유튜브다. 내가 암과 관련해 처음 본 동영상은 국립 암센터의 정소연 박사가 유방암에 좋은 음식과 안 좋은 음식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이었다. 음식으로 시작해서 운동으로 끝나는, 5분 남짓의 영상은 듣기에 무난했다. 온화한 목소리로 차분히 설명해 주니 저항감이 들지 않았다. 내용도 상식적인 수준이라 부담이 없었다. 이런 의사가 나의 주치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네 이웃의 의사를 탐내지 말아야지. 일산은 너무 멀었다.  


그 영상을 시작으로 각종 유방암 강의를 인강을 수강하듯이 독파했는데, 서울아산병원의 유방암 교육 자료들이 월등히 좋았다. ‘유방암 명의 안세현 교수의 백과사전 강의’ 한 편만 집중해서 봐도 유방암에 대해 전반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유방암 환자가 유튜브를 본 후 많이 하는 질문’ 영상까지 보면 개념 정리는 끝! <GBCC> 채널에 올라와 있는 한국유방암협회 강의와 <한국혈액암협회> 채널의 유방암 강의도 유익했다. 이런 영상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량은 길지 않으면서 환자의 눈높이에 맞춰 친화적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콘텐츠도 있었는데, 유방외과 유태경 의사와 성형외과 명유진, 한현호 의사가 진행하는 <우리동네 유방이야기, 우유TV>가 그런 채널이었다. 동갑내기 의사 셋이서 수다를 떠는 듯하면서도 중요한 점은 확실하게 짚어 주어서 재미있게 시청했다. 이학민 의사의 <더연세유외과> 채널은 한 회당 5~6분 분량으로 유방암에 대해 한 가지 주제씩 설명해 주어서 기억에 잘 남고 보기에 부담이 없었다. 


분당의 W 병원에서 0기 암이라는 말을 듣고 대학 병원에 갔을 때, 의사의 입에서 상피내암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당시에 나는 0기 암과 상피내암이 같은 말인 줄도 모르는 환자였다. 상피내암이라는 말 자체가 좀 어렵…지 않나? 48년 동안 한국어 사용자로 살면서 상피라는 단어는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암 보험 광고라도 좀 열심히 볼 걸 그랬나).  상피(上皮)는 말 그대로 제일 위에 있는 가죽이다. 상피 세포는 피부뿐만 아니라 우리 몸의 다양한 조직을 안팎으로 감싸고 있는 세포이다. 상피내암은 암이 상피의 안쪽에만 있다는 말이다. 암세포가 상피 안에 가만히 머물러 있으므로 ‘제자리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피내암은 유방을 비롯해 자궁경부, 대장, 방광, 위 등에서도 발견된다. 


내가 처음 조직 검사를 받은 병원에서 작성한 조직검사 결과지에는 ‘DCIS’라고 적혀 있었다. DCIS는 모유가 흐르는 유관 안에 암세포가 있는 유관 상피내암을 뜻한다. 상피내암은 말 그대로 제자리암이기 때문에 끝까지 그 자리에 머물기만 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기저막을 뚫고 주변 조직에 퍼지는 침윤암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상피내암이 가만히 있을지, 아니면 침윤암으로 발전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0기 암이지만 수술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방암은 병기와 아형에 따라 치료 방법이 달라진다. 암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에 따라  병기를 4단계로 구분한다. 유방암 1기는 종양이 2cm 미만이고 림프절 전이가 없는 경우, 2기는 종양의 크기가 2~5cm이면서 림프절 전이가 있거나 또는 종양의 크기가 5cm 이상이지만 림프절 전이는 없는 경우, 3기는 종양의 크기가 5cm 미만이지만 림프절 전이가 심하거나 종양이 5cm 이상으로 크지만 림프절 전이가 없는 경우, 마지막으로 4기는 폐나 뼈, 간 등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된 경우를 말한다. 유방암의 병기를 구분할 때 종양의 크기와 함께 림프 전이가 중요한 것은 암세포가 림프를 타고 다른 기관으로 퍼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4기가 마지막 단계이니 ‘말기’와 같은 의미인 줄 알았는데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말기는 치료에 반응이 없고 악화되어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태를 말한다. 모든 4기 환자가 말기 환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유방암은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발생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유방암학회에서  2022년에 발간한 유방암 백서에 따르면 미국, 유럽, 호주, 뉴질랜드, 일본은 모두 우리나라보다 유방암 발생률이 높다. 유방암은 잘 사는 나라 여성들이 걸리는 질병인 셈이다. 영미권과 유럽에서 환자가 많으니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을 것이고 치료제도 다양하게 개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거대의료자본의 힘일까. 어쨌든 그 연구의 결과로 유방암이라고 해서 다 같은 유방암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방암의 ‘아형’, 즉 유형은 암세포의 수용체에 따라 나뉜다. 세포에는 외부로부터 화학 신호를 받는 수용체가 있는데, 암세포도 돌연변이이긴 하지만 세포이므로 수용체가 있다. 암세포의 수용체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나 프로게스테론에 과도하게 반응해 증식하는 경우, 수용체가 허투(HER-2)라는 단백질에 과잉하게 활성화되는 경우, 여성호르몬과 허투 수용체 모두를 갖고 있는 경우, 두 종류의 여성호르몬과 허투 모두에 반응하지 않는 삼중 음성의 경우 등으로 나눈다. 각 경우마다 치료법과 예후가 다르다. 


앞으로 어떤 치료를 받게 될지 궁금해서 유방암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도대체 내가 왜 유방암에 걸렸는지도 알고 싶었다. 이미 걸렸는데 원인을 안다고 뭐가 달라지나? 유방암을 진단받은 날부터 자려고 누우면 영화 <건축학개론>의 신스틸러 조정석 배우가 자꾸 귓가에 대고 ‘납득이 안 가잖아, 납득이!’하고 외치는 듯했으니… 원인이 분명하면 갑자기 닥친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유방암 가족력이 없고, 초경은 또래 친구들 중에 제일 늦었고, 아이를 셋 낳아서 모두 모유수유를 한 데다가 비만도 아니었다. ‘서구화된 식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하루에 두 끼 이상은 밥과 반찬을 먹고, 채소와 과일도 늘 챙겨 먹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요인들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유방암에 걸리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유방암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암을 교통사고에 비유하는 건 무척 적절하다. 


유방암의 원인이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내게 의외의 위로를 주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암에 걸린 것만 같은, 정체불명의 죄책감을 털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숀(로빈 윌리엄스)은 윌(맷 데이먼)에게 입양과 파양과 학대로 얼룩진 윌의 어린 시절에 대해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라고 말한다. 숀은 윌이 이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10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해 준다. 조정석의 자리에 로빈 윌리엄스를 앉혔으니 애써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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