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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쥐마담 Dec 22. 2023

13. 모르는 게 약인가

질병에 대한 전문가는 의사이다. 환자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질병에 대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지식과 임상적 노하우를 쌓은 의사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질병을 공부하다 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의대에 입학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의 꿈을 응원한다. 하지만 환자가 하는 공부는 자신의 질병이 어떤 특성이 있는지 파악해서 치료 과정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리는 것과 이를 기반으로 진료실에서 의사가 설명하는 내용을 이해하고 궁금한 점 한두 가지를 물어볼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의사는 수술, 항암 화학요법, 표적 치료, 방사선 치료를 시행하는 사람이다. 의사는 이러한 치료를 ‘받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 치료들을 환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줄 것이 별로 없다. 나는 질병을 몸으로 겪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유방암 투병 과정에 있는 환우들의 기록을 살피기 시작했다. 블로그와 유튜브에는 자신의 투병 과정을 설명하는 환우들이 생각 외로 많았다. 그중에서 특히 A님의 블로그에 감탄했다. 


A님은 전생에 사관(史官)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유방암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도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거의 140편에 달하는 유방암 정보 항목의 글들은 한 편 한 편이 유용했다. A님이 치료 과정에서 생각하고 느낀 점들을 읽으면서 내게 다가올 일들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유용한 정보도 많았다. 암 환자가 장애인 증명서를 발급받으면 인적공제에서 기본공제 외에 장애인 공제로 200만 원을 추가로 공제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이 블로그에서 처음 알았다. 블로그를 소개하는 글 말미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었으면 하고 소망해 봅니다”라고 적혀 있었는데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A님이 평안하고 무탈하시기를,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2007년 5월에 개설된 네이버의 유방암 카페 <유방암이야기>는 대표적인 유방암 환우 카페로 가입자가 16만 명이 넘는다. 나는 카페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유방암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 보면 카페 회원들이 올린 글도 종종 검색되곤 했다. 그중에서 카페 회원들이 다른 회원의 검사결과지를 해석해 주는 글이 눈에 띄었다. 영문 의학 용어로 적힌 검사결과지는 암의 세계에 급작스럽게 발을 들인 환우에게는 난수표나 마찬가지다. 의사의 설명은 충분하지 않고, 아는 것이 없으면 질문할 수도 없으니 퍽  난감하다. 먼저 아팠고, 자신의 질병에 대해 공부했고, 질병이라는 낯선 세계에 불시착해 당황한 사람을 모른척하지 않는 사람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질병의 한가운데에서도 타인을 향한 도움의 손길은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친구에게 선물 받은 <굿바이 유방암>은 유방암 환자가 된 의사 박경희와 그의 선배인 혈액종양내과 의사 이수현이 함께 쓴 책이다. 박경희는 스물여섯 살, 레지던트 1년 차 전공의로 병원에서 근무하던 중에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의사와 환자의 자리가 박경희라는 사람 안에서 겹쳐진다. 이 책은 유방암 전반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도 유용하지만 환자가 된 의사의 관점으로 질병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박경희는 책에서 "좋은 의사가 되는 것만큼 좋은 환자가 되는 것도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병에 대해, 또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일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더불어 의사가 해 줄 수 있는 것과 해 줄 수 없는 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했다. 저자의 말처럼 유방암에 대해 알면 알수록 안개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조금씩 걷혔다.


나의 질병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알아가기로 결심한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질병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걱정이 늘어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친구인 유방암 경험자 H는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질병에 대응했다. H는 유방암에 대해 더 알기보다는 신경을 끄는 쪽을 택했다. 나처럼 궁금한 건 하나라도 더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냥 놔둬야 마음이 편한 사람도 있다. 어떤 방식이 자신에게 맞는지는 자기만 알 수 있다. 질병이라는 큰 고비는 삶의 위기인 동시에 나를 알아가는 기회가 된다. 인생은 나를 탐구하는 과정이고, 이 과정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의사를 신뢰하고 의사가 제시하는 치료 과정을 성실하게 밟아 나가야 한다. 현대 의학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들은 현대 의학 안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뜻이 된다. 통합치료, 대체의학, 기능의학, 자연치유, 민간요법은 병원에서 제시하는 유방암의 표준 치료와는 결이 다르다. 많지는 않지만 외과적 수술, 항암 화학 요법, 방사선 치료 등을 받지 않거나 일부만 받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환자도 있고, 이런 치료를 통해서 회복되는 사람도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병원에서 표준 치료를 받는 쪽을 선택했으므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표준 치료로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그때는 다른 길을 탐색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병기가 확정된 것도 아니고 아형도 모르므로 유방암 초졸 검정고시를 겨우 통과한 셈이었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시간과 에너지가 적잖이 들었다. 그나마 돈은 없어도 시간은 여유로운 편이어서 내 질병에 대해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양질의 지식과 혹세무민의 억측을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유방암 2기 진단을 받은 어느 약사는 자신의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내고 케이블 TV  방송에도 출연했다. 책 표지에는 ‘표준 치료 후 재발과 전이 없이 암을 이겨낸 식이요법, 생활습관, 보충제 꿀팁을 알려준다’고 나와 있다. 유튜브 영상에서는 ‘암 완치’라는 문구도 쓰던데, 느낌이 좀 이상했다. 유방암, 특히 호르몬 수용체 양성 유방암은 표준 치료를 마치고 5년 이내에 재발할 확률과 5년 이후에 재발할 확률의 거의 반반이다. 그래서 의사들은 유방암과 관련해 ‘완치’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이 약사가 자신의 약국에서 환자를 30분 동안 상담하고 받는 상담료는 35만 원, 비대면 톡 상담료는 15만 원이고, 약국에만 유통되는 S회사의 제품을 보충제로 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약사가 추천하는 보충제를 모두 구매하면 150만 원(한 달 기준) 정도라니… 선택은 개인의 몫이지만 왠지 입맛이 썼다. 정말, 모르는 게 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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