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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쥐마담 Dec 29. 2023

14. 설명을 들을 권리

누군가 슈퍼 히어로처럼 번쩍 나타나 내게 닥친 어려움을 해결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이 세상천지 어디에도 내 문제를, 그것도 내 몸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사람은 없다. 피할 구멍도 돌아갈 우회로도 없으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지금까지 살면서 인생은 받아들이는 거라고 배웠다. 눈앞의 상황을 부정하거나 회피할수록 문제는 더 꼬이기 마련이고, 썩 유쾌하진 않아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해결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했다. 우리 집 아이들이 가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늘어놓을 때면 나는 “우주는 너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 말을 나에게 해 줄 차례였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으니, 비록 소심한 겁쟁이지만 인생의 난국을 타개할 영웅이 되어 보… 아니다. 영웅 코스프레 정도면 적당하다. 


2023년 새해 첫날은 일요일이었다. 오전에는 교회를, 오후에는 잔나비 콘서트를 갔다. 이미 작년 11월에 잔나비의 전국 투어 콘서트에 다녀왔지만 암 수술을 받기 전에 한번 더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예약 대전에 뛰어들어 1월 1일 서울 앙코르 콘서트 티켓을 거머쥐는 행운을 얻었다. 잠실 올림픽홀에서 3000명의 관중과 더불어 한 해를 버텨낼 기운을 꽉꽉 채웠다. 이 기운을 잘 간직했다가 2주 반 뒤 수술을 받을 때 써야지.


수술을 열흘 앞두고 아침에 교회에 들렀다. 아침 기도회를 마치고 신부님이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하셔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우리 교회 건물 6층에는 옥상 정원이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계절마다 꽃이 피어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겨울이고 딱히 볼 건 없는데… 놀랍게도 볼 게 있었다. 화단을 덮고 있는 낙엽을 살짝 들추니 새끼손톱보다 작은 초록빛 새순이 올라와 있었다. 반원 여러 개가 겹쳐진 모양으로 봉긋봉긋 솟아오른 식물의 정체는 상사화라고 했다. 긴 꽃대 끝에서 하늘거리는 연분홍 꽃잎을 피우는 상사화의 새순이 이처럼 단단하고 옹골진 모습일 줄이야. 영하의 날씨에 꽝꽝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른 에너지가 내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이런 게 진짜 ‘우주의 기운’이다.  


수술 전날, 오후에 입원하라는 안내를 받은 대로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남편과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교회에 들러 신부님의 기도를 받고 병원으로 넘어가 입원 수속을 했다. 별관 병동이 배정되었는데 병동에 도착하기도 전에 검사하러 오라고 전화가 왔다. 남편에게 짐을 들고 병동에 먼저 가 있으라고 하고, 부리나케 유방센터로 갔다. 유방 엑스레이를 찍고 초음파 검사 차례를 기다리며 검사실 앞 대기석에 앉아 있는데 전신마취를 설명하는 동영상 링크가 달린 문자가 날아왔다. 살면서 전신마취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살짝 걱정이 되었다. 열심히 애니메이션 영상을 시청했고 기도삽관 과정에서 드물지만 치아가 손상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취에도 합병증과 부작용이 있다니, 뭐 하나 쉬운 게 없구나. 그런데 이건 의사에게 들어야 할 설명이 아닌가? 이 동영상을 제작한 회사 홈페이지에는 “열 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습니다”라는 문구로 애니메이션 설명 처방을 홍보하고 있었다. 시각적인 이미지와 설명을 함께 제시하므로 이해하기 쉽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이런 식으로 환자와 의사가 접촉할 기회를 줄이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모르겠다. 유방촬영실과 초음파 진단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수술 부위를 표시하는 사이에 입원 생활 영상과 유방 수술 전 교육 영상이 계속 날아왔다.    


병동으로 돌아오니 5인실 병실에 배정이 되었다. 설마 했는데 5인실은 만석이었다. 말이 5인실이지, 보호자가 같이 있어서 10명이 한 방을 쓰는 셈이었다. 왼쪽에는 침대가 세 개, 오른쪽에는 침대 두 개와 화장실이 있는데 내 자리는 양쪽으로 모두 환자가 있는 왼쪽 가운데 침대였다. 창가 자리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좀 아쉬웠다. 배정된 자리는 바꿔주지 않는다고 하니 수술이 잘 되어서 얼른 퇴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간호사실에 가서 마커로 점을 찍어 수술 부위를 표시한 자리에 방수 테이프를 붙이고, 키와 몸무게를 재고, 기본적인 사항을 체크했다. 몸무게가 평소보다 1kg이 줄어서 56kg이었다. 수술을 일주일 앞두고 코로나19나 독감, 감기 등등에 걸리지 않도록 외출을 자제하면서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열심히 먹었는데, 왜 줄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침대에 앉아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환자식으로 저녁을 먹으니 비로소 환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살짝 들었다. 환자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통증이지만, 환자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도 통증이다. 나는 아무런 통증도 증상도 느끼지 못한 채로 이 자리까지 왔으므로 환자라는 정체성을 갖기가 어려웠다. 수술을 받으면 통증이 따를 테니, 나 자신을 환자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수술이 기다려지는 건 아니었지만, 수술을 통해서 정신과 몸의 불균형이 조금은 제자리를 찾기를 기대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담당 교수가 회진을 했다. 이 의사와 세 번째로 만나는 셈이었다. 나는 두 번째로 의사를 만났던 4주 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유방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알기 위해 노력했고, 수술에 대해 질문하고 싶은 것도 생겼다.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의사에게 내일 수술을 하면서 겨드랑이의 림프절 생검술을 하는지 물었다. 의사는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림프 부종이 생길 가능성 때문에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고, 혹시 문제가 생기더라도 재수술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내일 수술은 간단한 수술이니 별 문제없을 거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나는 이전 병원에서 총 생검술로 유관 상피내암, 즉 0기 암을 진단받았지만 이것은 최종 병기가 아니다. 내일 수술로 떼어낸 부위를 병리학적으로 다시 검사하는 과정을 거쳐야 병기가 확정된다. 만약 그 검사에서 암세포가 조금이라도 유관의 기저막을 뚫고 나가면 병기는 0기에서 1기 이상으로 바뀐다. 암세포가 기저막을 뚫고 나갔다는 것은 혈액과 림프를 타고 온몸으로 퍼질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유방암 수술을 할 때 유방의 림프가 제일 먼저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는 겨드랑이의 림프절을 떼어서 암세포의 유무를 확인하는데, 이를 ‘감시 림프절 생검술’이라고 한다. 그런데 림프절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림프가 순환하지 않아 부종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고, 부종은 일단 발생하면 회복이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내용을 의사가 설명해 준 적은 없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알게 된 사실이다.


예상과 달리 감시 림프절 생검술을 하지 않는다는 답을 들어서 조금 당황했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수술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최선인데, 수술을 하기도 전에 재수술을 하면 된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의사의 말처럼 나는 부분 절제술을 선택했으므로 전 절제 수술 환자와 달리 재수술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수술이 잘 되고, 내 암세포가 모두 유관 안에 얌전히 머물러 있는 상태라면 재수술은 필요 없다. 의사가 감시 림프절 생검술을 하지 않기로 했다면 상피내암 이상이 아닐 확률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고 이해하면 되는데,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어설프게 선행학습을 한 건지 혼란스러웠고 당장 내일 받을 수술보다 재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담당 교수 회진을 마친 환자들이 한 곳에 모여 간호사에게 수술 교육을 받았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뒤에 10분마다 5~10회씩 심호흡을 꼭 하라는 설명을 듣고 병실로 돌아왔다. 4시간 간격으로 혈압과 체온을 재러 병실에 오는 젊은 간호사들에 비해 확실히 연차가 높아 보이는 간호사가 능숙하게 왼팔에 정맥 주사 카테터를 달아 주었다. 곧이어 주치의가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받으러 왔다. 나는 주치의에게 수술 범위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하지만 주치의는 암세포 주변에 1cm 정도의 마진을 두고 잘라내어 조직 검사를 한다고만 답할 뿐, 유방을 얼마큼 절제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내 몸의 살덩어리를 얼마나 잘라내는지도 모르고 수술을 받는다니, 답답할 뿐이었다. 


이 대학 병원의 홈페이지에는 환자권리장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존엄의 권리이다. 환자는 존엄한 인간으로서 예우받을 권리가 있다. 둘째, 평등의 권리이다. 환자는 성별, 연령,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을 떠나 평등한 진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 셋째, 설명을 들을 권리이다. 환자는 의료진으로부터 질병의 진단, 치료 계획, 결과, 예후에 대한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다. 넷째, 개인 신상 비밀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환자는 진료내용, 신체의 비밀 및 개인생활의 비밀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이 네 가지 권리 중에서 설명을 들을 권리가 가장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수술 전날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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