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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쥐마담 Jan 12. 2024

16. 감사의 절정

수술받은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수액 주머니를 살펴보니 거의 다 들어간 것 같았다. 간호사에게 더 맞아야 할 주사나 수액이 있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마침 바늘을 빼 드리려고 했다는 말에 속으로 야호를 외쳤다. 수술 부위의 통증보다 정맥 주사 바늘의 이물감이 더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바늘을 뽑고 나니 나이롱환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픈가? 서지 브라로 가슴을 꽉 싸매어 답답할 뿐, 크게 아프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술한 뒤에 절개한 부위가 잘 붙지 않거나 열이 날 수도 있다던데 나는 그런 경우를 비껴갔다. 수술로 떼어낸 부위가 정말 작았거나, K-의료 기술이 대단하거나, 내가 고통을 잘 참는 편이거나, 이 모든 요인이 고루 영향을 끼쳤거나… 환자복만 걸친 환자에게 남은 일은 병원에서 하룻밤을 더 버티고 내일 오전에 신속히 병원을 탈출, 아니 퇴원하는 일뿐이었다. 병실은 가습기와 안대와 귀마개가 꼭 필요한 곳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건조하고 눈부시고 시끄러울 줄 몰랐다. 환부가 아파서 죽겠다고 외쳐야 진짜 환자인데, 나는 피부가 쩍쩍 갈라지고 눈이 부시고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라고 구시렁대고 있었다. 통증보다 불편감을 더 크게 느끼니, 집에 가는 게 최고의 처방이었다.  


다음 날 오전에 휴게실에서 단체로 퇴원 교육을 받았다. 휴게실에 모인 십여 명의 환자들은 연령대가 다양했다. 수술 전날에도 같은 장소에서 수술을 앞둔 환자들과 교육을 받았는데, 그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나는 나를 수술한 의사의 말대로 ‘간단한’ 수술을 받았고 수술도 잘 되어서 곧 퇴원을 앞두고 있지만, 그 수술은 나에게 유방암 환자라는 정체성을 부여했다. 나는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옅은 동질감을 느꼈다.


간호사가 유방 외과 교수가 유방암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을 틀어 주었다. 화면 속의 의사는 진료실에서는 듣지 못한, 암에 대한 통계를 제시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평균 수명에 도달한 남성 다섯 명 중에 두 명, 그리고 여성 세 명 중에 한 명은 암으로 사망한다고 말했다.  암 진단을 받고 살기 위해서 수술을 선택한 환자들, 수술로 신체의 일부를 도려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환자들에게 한국인의 1/3 이상은 결국 암으로 죽는다고 말하다니, 평소의 나 같으면 대놓고 따지지는 못해도 ‘고객의 소리’라도 한 줄 작성할까 고민했을 텐데, 오히려 그 통계에 무장 해제가 되었다.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죽음은 삶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눈을 뜨면 매일이 전쟁까지는 아니어도 정신없이 돌아가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기 전까지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느라 허우적거린다.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인간관계의 진창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지만, 대체로 그건 생각으로 끝날뿐이다. 아이들의 엄마라는 자리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자리이다. 살기도 어렵지만 죽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이런 이유로 언젠가는 생이 끝난다는 사실은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안전하게 모셔져 있었다. 아직 50살도 되지 않았으니 늙은 오이처럼 더 누렇고 쭈글쭈글해져야 죽음의 자리에 이를 거라고 생각했다. 의사가 보여 준 통계는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없다는 대전제에 불을 켰다. 나만 암으로 죽을까 봐 서럽고 무서웠는데 세 명 중에 한 명은 암으로 죽고 한국 여성 20명 중에 한 명은 유방암으로 죽는다니, 이러다가 다 죽어… 야릇한 위로가 임했다. 


영상이 끝난 뒤에 드디어 의사가 등장했다.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재활의학과 수련의가 림프 부종을 설명했다. 유방에서 생성된 암세포가 림프관을 타고 겨드랑이의 림프절까지 도착했는지 확인하는 감시 림프절 절제술이나 이미 림프절까지 번진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 림프절도 제거하는 림프절 곽청술을 받은 환자는 수술 후 부작용으로 림프 부종을 겪을 수 있다. 림프 부종은 한번 발생하면 잘 회복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어서, 환자들의 질문이 빗발쳤다. 수술실에서 겨드랑이를 건드리지 않은 나는 노겨존, 노 겨드랑이 존에 옹크린 자였다. 림프 부종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으므로 궁금한 것도 묻고 싶은 것도 없었다. 조용히 휴게실을 빠져나와 퇴원 준비를 했다. 교육이 시작될 때 수술 동기들에게  느꼈던 동질감은 휘발성이 강했다. 같은 질병을 앓고 있어도 암종과 병기에 따라 각각 처지가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다른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남편이 병원비를 정산하는 동안 옷을 갈아입고 짐을 정리했다. 남편은 집에 가서 차를 가져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한시라도 병원을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집까지 충분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배낭에서 짐을 덜어 남편의 배낭을 더 꽉 채우고  병동을 나섰다. 햇살은 밝게 빛났고 공기는 적당히 차가웠다. 평소보다 천천히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안방 문을 여는 순간 혼자 조용히 침대에 누울 수 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병실에서 보낸 이틀 밤 때문에 평소에 무덤덤하게 지나쳤던 것들이 마구잡이로 감사하게 느껴진 순간은 간사하게 잠시뿐이었지만, 순도는 높았다.      


병원에 입원한 이틀 동안 엄마가 아이들을 돌봐주셨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엄마가 끓인 배추 완자탕을 점심으로 먹었다. 밥을 먹고 다시 안방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며칠간 수술 부위가 잘 아물도록 먹고 자고 쉬는 환자의 본분에 충실하는 일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소설 <파친코>를 읽다가 낮잠을 잤고, 저녁을 먹고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소설의 여운에 젖어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남편은 출근한 뒤였고 아침잠이 없는 막내만 일어나 있었다. 대학에 합격한 고3 아들과 중3 딸은 겨울 방학을 맞아 늦잠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어젯밤에 소설을 완독 해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설마 심심한 건가? 심심했다. 겨우 하루 먹고 자고 쉬었는데 좀이 쑤시다니… 3일 동안 샤워를 안 했으니 일단 씻어야 했다. 수술 부위에는 방수 테이프를 붙여 놓아서 샤워가 가능했다. 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간호사가 서지 브라를 열고 수술 부위를 확인할 때, 나도 열심히 곁눈으로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봉합사로 꿰맨 자국이 없잖아? 절개된 피부를 의료용 본드로 봉합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실로 봉합하지 않았으니 드레싱을 할 일도, 실을 제거할 일도 없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샤워도 했으니 내친김에 살짝 콧바람을 쐬기로 했다. 머리를 말리고 슬렁슬렁 걸어서 교회로  갔다. 오전 9시 아침 기도 시간에 딱 맞게 도착을 했는데 신부님들이 나를 보시고 깜짝 놀라셨다. “어, 어떻게 오셨어요?” “올 만해서 왔어요. 주님만 믿지 마시고 K-의료도 좀 믿으십쇼.” 


오후에는 동네 친구들에게 생존 신고를 할 겸 단골 카페에 들렀다. 마음을 써 준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익숙한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자 모든 것이 전과 다름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며칠 더 쉬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커피만 마셔야지, 김칫국을 들이켤 수는 없었다. 몸에서 떼어낸 부위에 대한 조직검사 결과에 따라 판세가 뒤집힐 수 있었다. 암세포가 유관에 얌전히 머물지 않고 조금이라도 주변 조직으로 퍼졌다면, 그래서 병기가 바뀐다면, 항암 치료를 해야 한다면… 이런 생각이 꼬리 물기를 하면 대책이 없으니, 상처 부위가 아물기를 기다리면서 조신하게 2주를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설 연휴로 가족들이 부산 시댁으로 내려간 덕분에 며칠 동안 제대로 푹 쉴 줄 알았는데,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2주 동안 통증보다 서지 브라의 압박감이 훨씬 힘들었다. 몇 년 전부터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으면 온몸이 피곤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헐렁한 의생활을 받아들일 나이가 되었구나 싶어서 레깅스와 멀어졌는데, 24시간 가슴을 압박하고 지내려니 고역이었다. 얼른 의사를 만나서 서지 브라를 벗고, 조직 검사 결과를 듣고, 결판을 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드니 결과에 직면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외래 진료가 3일 앞으로 다가온 날부터 밤잠을 설친 것이 그 증거였다.   


대망의 외래 진료가 돌아왔다. 의사를 만나기 전에 상담 간호사실에 들르라는 연락을 받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술 후 교육을 담당했던 간호사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수술 후 처치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림프 부종에 대해 물었다. 나는 수술장에서 겨드랑이를 건드리지 않았으므로 림프 부종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수술한 쪽 팔로 채혈해도 되고 혈압을 재도 된다는 말을 듣고 걱정을 싹 털었다. 


상담 간호사실에서 나와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쿵쾅거렸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건 심호흡뿐이다. 진료실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더니 간호사가 서지 브라를 열어서 환부에 대 놓은 두꺼운 거를 확 잡아채 쓰레기통에 버렸다. 2주 동안 가슴을 짓눌렀던 압박감의 빈자리는 결과에 대한 중압감이 채울 것인지… 옆 진료실과 연결된 문으로 담당 교수가 들어왔다. 의사는 환부를 보더니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가슴이 더 줄어들 거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라고 하더니 키보드를 두들기며 뭔가를 입력하고 ‘수술 및 병리검사 결과지’라고 적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진단명, 병변의 크기, 림프절 전이 여부, 추가 수술 필요 여부, 병기를 나타내는 숫자, 추가 치료의 종류를 표시하도록 미리 인쇄한 종이였다. 의사는 그 종이에 볼펜으로 O와 X를 표시하면서 설명을 했다.  


“암이 4cm 정도 되어서 생각보다 많이 도려냈습니다. 도려낸 부위의 끝부분, 12시, 3시, 6시, 9시 방향을 수술장에서 조직 검사하고 12시와 3시 부분을 더 도려냈습니다. 병리과에서 검사한 결과 모두 상피내암으로 나왔습니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나에게는 재수술도 항암 치료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분 절제를 했으니 방사선 치료는 당연히 받아야 하고, 항호르몬제인 타목시펜만 5년 동안 복용하면서 6개월 뒤에 봅시다.”


‘상피내암’과 ‘병기 0’, ‘방사선 치료’, ‘항호르몬 치료’에 O가 쳐진 종이를 건네받으며 나는 진심으로 의사에게 감사했다. 그는 내 유관의 암세포를 남김없이 제거했다. 그의 판단과 결정 덕분에 나는 림프 부종에 대한 염려로부터 벗어났다. “교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의 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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