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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쥐마담 Jan 19. 2024

17. 끝이 아니라 시작

의사는 항호르몬제의 부작용 때문에 정기적으로 부인과에서 자궁 검진을 해야 한다고 했다. “집 근처 병원에서 검진을 받으시면 됩니다. 댁이 어디시죠?” 집 근처 병원은 여기인데… 동네 이름을 말하는 순간 의사는 “아, 그럼 여기서 받으세요.”라고 답했다. 진료실에서 나와 간호사를 기다렸다. 간호사는 다음 예약 환자를 진료실로 들여보내고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진료 후 안내문을 주면서 요양급여회송서를 발급받으라고 했다. 동네 의원이나 병원에서 대학 병원 같은 상급 의료 기관으로 환자를 보낼 때는 진료의뢰서가, 상급 의료 기관에서 하급 의료 기관으로 환자를 보낼 때는 요양급여회송서가 필요하다. 의사가 말한 ‘여기’는 이 대학 병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이 병원 맞은편에 있는 M 산부인과 의원이었던 건가? 


나는 간호사에게 이 대학 병원에서 부인과 진료를 받겠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우리 병원이 출산을 하기에는 좋은 병원이지만 그 외에는 별로라고 대답했다. 자기가 근무하는 대학 병원 산부인과가 별로라니?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를 말이었다. 앞으로 6개월마다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해서 병원에 올 때 산부인과 검진도 같이 받으면 되는데… 왜 이 대학 병원에서 예약을 잡아주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1분 전에 감사의 절정을 찍은 자로서 간호사와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자궁 검진일 뿐인데 뭘. 예약을 잡았다가 생리 날짜와 겹치기라도 하면 취소를 하고 또 예약을 잡아야 하니 번거롭겠네.’ 조직 검사 결과를 듣기 직전까지 초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그만 쉬게 하고 싶었다. 간호사에게 알겠다고 대답하고 물러났다. 


수납을 하고, 6개월 뒤에 받을 검사와 진료 예약을 하고, 보험사에 제출할 각종 서류를 챙기고, 요양급여회송서를 발급받았다. 들르라는 곳이 더 있었지만 한숨 돌리려고 남편과 병원 안에 있는 카페로 갔다. 여동생이 준 쿠폰으로 비싼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0기 암 진단을 자축했다. 아직 갈 길은 멀었다. 방사선 치료는 시작도 안 했고 재발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가야 했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아니 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만큼은 재수술과 항암 화학 요법을 피한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톡으로 확정된 병기를 알렸다. 다들 좋은 소식이라며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이 좋은 소식을 전해도 좋을지 머뭇거리게 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던 날, 지인 Q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수술을 잘 받으라는 응원의 메시지였는데, 그다음 문장을 읽고 너무 깜짝 놀랐다. Q는 우리가 같은 클럽이라고 했다. Q도 유방암 수술을 앞두고 있다니, 난데없는 소식에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자고 했다. 그때부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안부를 챙기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Q는 엊그제 수술을 받았는데 보내준 메시지로 미루어 짐작컨대 나보다 더 병기가 높은 것 같았다. Q는 의사에게 항암 화학 요법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좋은 소식이 Q의 마음을 흔들까 봐 염려가 되었다. 조심스럽게 Q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Q는 축하한다며 자신의 퇴원 소식을 전했다. 제발 Q가 항암 화학 요법을 피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진료 후 안내문에는 아직 들러야 할 곳이 두 군데 더 남아 있었다.  남편은 회사로 복귀하고 나는 다시 유방 센터로 돌아갔다. 상담 간호사실에서 항호르몬제 복용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항호르몬제는 암세포의 수용체가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먹는 약이다. 나처럼 폐경 전의 환자에게는 에스트로겐이 작용하지 못하게 하는 타목시펜이, 폐경 후의 환자에게는 에스트로겐 생성을 차단하는 아로마타제 억제제가 처방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타목시펜의 가장 치명적인 부작용은 자궁내막증식증과 자궁내막암이었다. 암을 피하려고 먹는 약이 암 발생 확률을 높인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 외에도 혈전이나 시력 저하, 갱년기 증상 등 부작용 목록이 꽤 길었다. 나는 이 중에서 어떤 부작용에 나는 당첨될지, 먹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5년 동안 정해진 시간에 매일 약을 복용할 과제를 받은 셈인데, 항암 화학 요법을 피한 감사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었으므로 재발을 막기 위해 먹을 수 있는 약이 있다는 걸 고맙게 여기기로 했다. 


수술을 받고 외래 진료를 기다리는 2주 동안에 짬이 날 때마다 암과 음식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는데, 내 식습관에서 딱히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찾지 못했다. 2020년, 코로나19로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봉쇄되었을 때 도저히 삼시 세끼를 모두 내 손으로 차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반조리 식품이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힘들고 귀찮아도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들이 건강한 식습관을 갖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먹고 싶다고 하면 치킨이나 피자, 햄버거를 시켜 주긴 했지만 한 달에 한 번이 될까 말까 했다. 혹시나 즉석식품으로 손쉽게 끼니를 때우다가 입맛이 바뀔까 싶어서 주방에 전자레인지도 놓지 않았다. 육가공품을 내 돈 주고 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명절에 선물 세트로 들어온 스팸을 일 년에 한두 번 먹었을 거다. 내 집 식탁은 유방암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서구화된 식습관’, 즉 고지방 고칼로리식과는 거리가 먼데, 여기서 더 건강한 방향으로 갈 수가 있나? 의사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암의 원인을 탐구해 봤자 내 속만 상한다. 그냥 재수가 없어서 걸린 거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유방암의 위험도를 증가시킨다고 증명된 인자들 중에서 한 가지는 나에게도 해당이 되었다. 술이다. 2022 유방암 백서에 따르면 어떤 주종이든 하루 알코올 10g(40% 위스키 25ml, 25% 소주 40ml, 12% 포도주 85ml, 맥주 250ml)을 섭취하면 폐경 여부에 관계없이 유방암 발생을 7~10% 증가시킨다고 한다. 알코올의 대사물인 아세트알데히드도 발암물질이지만, 알코올이 체내의 에스트로겐과 안드로겐의 분비를 증가시킨다니… 나는 유방암을 진단받고 난 뒤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5년 전 유방암의 사정권에 들어갔을 때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36살에 셋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육아가 연장된다는 사실이 가혹하게 느껴졌다. 인생은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서 있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그 사랑만큼 강렬하고 컸다. 그즈음 남편이 중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육아 외에는 할 것이 없는 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마흔 살의 경력 단절 여성이었다. 이듬해 봄에 불면증을 앓은 것을 시작으로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졌다. 이러다가 삶을 잃어버리겠다는 위기감이 코 밑까지 찰랑거렸고, 용기를 내어 재취업을 했다.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돌보느라 늘 허덕였다. 해가 떠 있는 내내 분주한데 글까지 쓰기 시작했으니 종일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으로 살았다. 저녁 식탁을 차리고 캔 맥주를 따면 비로소 하루를 무사히 마감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취할 때까지 마시지는 않았지만 성실하고 꾸준하게 규칙적으로 맥주 한 잔을 마셨다. 이것도 나름의 알코올 의존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루씩 건너뛰기도 하고, 무알콜 맥주를 마셔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맥주캔을 따는 소리, 그 소리가 주는 위로로 여지없이 돌아오곤 했다. 수술하기 일주일 전쯤 330ml짜리 칭따오 맥주를 한 캔 샀다. 그 맥주를 마시고 빈 맥주캔을 책장 안에 고이 모셔 놓았다. 그렇게 맥주와 이별했다. 


영양 상담은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과식하지 않고, 하루에 3번 규칙적으로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단순당과 고지방 육류, 열량이 높은 빵, 떡, 과자류, 튀김, 패스트푸드 섭취를 조절하고 잡곡밥과 살코기, 생선, 콩과 두부를 먹으라는 내용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 다양한 색깔과 향의 신선한 채소를 끼니마다 150g씩, 하루에 450g을 섭취하라는 대목에서 깜짝 놀랐다. 심지어 그 이상 먹으면 더 좋다나. 소가 되라는 말인가… 매끼마다 김치를 제외하고 채소 반찬을 두 접시 이상 먹을 수가 있나? 영양사는 살이 찌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에스트로겐은 난소에서 만들어지는 줄로만 알았는데 지방 조직에서도 생성된다니. 인체의 신비는 끝이 없었다.


나는 표준 체중에서 6kg가 덜 나가므로 살이 찔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영양사에게 평소에 먹는 저녁 식탁 사진을 보여주니 이 정도면 충분히 건강한 식생활이라고 했다. 하지만 뭔가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맥주와는 확실히 헤어졌으니 아침에 먹는 빵을 통밀빵으로 바꾸고, 어쩌다 먹는 삼겹살이나 튀김, 치킨은 완전히 끊고, 채소를 한 사발씩 먹어 볼 테다. 순간적으로 전의가 불타올랐다. 열심히 관리해서 재발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지. Q의 말대로 수술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이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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