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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쥐마담 Feb 02. 2024

19. 보이지 않는 타격

항호르몬제를 처방받고 처음 약국에 들렀을 때, 약사는 여러 증상이 나타날 수 있지만 약을 복용하고 3개월 정도 지나면 몸이 약에 적응할 거라고 했다. 나에게는 어떤 증상이 나타날까? 심각한 부작용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약을 삼켰다. 병원 간호사의 말대로 매일 같은 시간, 아침을 먹고 난 뒤에 복용하기 위해 핸드폰에 알람 설정을 했다. 


약을 먹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는 날, 방사선종양학과 외래 진료를 받기 위해서 다시 병원에 들렀다. 유방 부분 절제 수술을 선택했으므로 방사선 치료는 반드시 받아야 했다. 이 진료를 기다리면서 방사선 치료에 대한 영상을 몇 편 보고 환자들의 치료 후기도 챙겨 읽었는데, GBCC 채널에서 삼성서울병원의 김해영 부교수가 “유방 보존 후 방사선 치료”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 영상이 유익했다. 우리 몸에 방사선을 쪼이면 정상 세포와 암세포 모두 타격을 입지만 정상 세포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는 반면에 암세포는 사멸한다고 한다. 이 과정을 시각화한 자료와 함께 설명해 주어서 이해가 잘 되었다. 방사선이 암세포의 DNA 사슬을 때리면 이중 나선 구조가 끊어진다. 암세포가 흐물거리며 파괴되는 장면을 상상하니 야릇한 쾌감이 느껴졌다. 정상 세포가 가진 회복의 힘을 믿고 치료를 잘 받아 보겠다는 의지가 싹텄다. 


첫 외래는 치료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끝났다. 담당 교수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의사였다. 의사는 방사선 치료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방사선 치료 자체는 아무런 통증이 없지만 방사신이 치료 부위에 조사되는 횟수가 누적되면 피부에 변화가 생긴다. 피부가 가렵고, 따갑고, 열감이 느껴지고, 벗겨지거나 물집이 생길 수 있다.  아울러 ‘방사 피로’를 호소하는 환자들도 적지 않은데, 나의 경우는 오른쪽 유방에 방사선을 16회 조사한 뒤 수술한 부위에 집중적으로 3회 더 조사하는 방식으로 총 19회에 걸쳐 치료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암종과 기수에 따라서 치료 횟수가 달라지는데, 19회가 최소인 듯했다. 방사선 폐렴이라는 부작용도 있지만 드물다고 하니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진료실을 나와 옆방의 수련의에게 추가로 설명을 듣고, 수련의 옆자리에 앉은 간호사에게 한 번 더 교육을 받고, 치료 일정을 확정했다.  


닷새 뒤에 방사선 모의 치료를 위해 다시 병원에 갔다. 접수를 하고 탈의실에 들러 가운으로 갈아입고 차례를 기다렸다. 모의 치료는 말 그대로 시뮬레이션이다. 치료 자세를 설정하고 치료 부위에 잉크로 기준선을 표시한 뒤 치료 계획을 설계하기 위해 CT를 찍는다. 이때 그리는 기준선이 지워지면 안 되기 때문에 미리 최후의 샤워를 하고 치료에 임하는 것이 준비 같지 않은 준비다. 수술로 겨드랑이 림프절을 제거한 환자들은 팔이 어깨 위로 올라가는지 여부도 중요하다. 유방암에 대한 방사선 치료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시행하기 때문이다.  CT를 찍기 전에 조영제를 맞기도 하는데, 나는 간호사에게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미리 안내를 받았다. 어떤 기준으로 조영제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지는 모르겠다. 


CT 촬영실에 들어갔다. 두 명의 방사선사 나를 맞아 주었다. 바로 CT 촬영을 할 줄 알았는데 먼저 얼굴 사진부터 찍어야 한다고 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의료 사고를 방지하는 절차였다. 마스크를 벗고 사진을 찍었다. 신발을 벗은 뒤 기계에 올라앉았다. 가운 매듭을 풀고 누워서 방사선사가 시키는 대로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최대한 움직임 없이 가늘게 숨만 쉬면 되니 어려울 건 없었다. 방사선사가 미세하게 몸을 움직여 조정을 했다. 의료용 특수 잉크가 묻은 가늘고 얇은 도구가 피부에 닿을 때 살짝 차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사선사는 순식간에 선을 긋고 가운을 다시 덮어 준 뒤에 왼쪽으로 머리를 살짝 돌리고 몸의 힘을 빼라고 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힘을 빼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없었다. CT가 작동하자 기계음과 ‘삐’ 소리가 들렸다. 인생의 첫 CT 촬영은 달랑 2분으로 끝났다. 잉크가 마를 때까지 10분쯤 기다렸다가 옷을 갈아입으면 된다는 안내를 받고 CT 촬영실에서 나왔다. 모의고사를 치른 기분으로 모의 치료를 마쳤다.  


대망의 첫 방사선 치료는 일주일 뒤로 잡혔다. 모의 치료에서 촬영한 영상을 토대로 방사선 치료를 설계해서 방사선의 조사 방향과 범위, 조사량 등을 정하는 과정에 시간이 꽤 걸리는 셈이었다. 간호사가 기록해 준 첫 치료 시간은 2023년 2월 21일 화요일 20시 20분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치료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주말을 제외하고 19회를 치료받으면 3월 20일 월요일에나 마치게 된다. 병원에서 항암 화학 요법을 하지 않는다는 피드백을 받았을 때 이번 봄 학기에도 일주일에 두 번 출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강의 일정을 잡았다. 과연 피로감은 어느 정도일까? 직접 받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수업을 마치고 병원에 들러서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가 기절하듯 자면 되지 않을까, 낙관하기로 했다.


방사선 치료 첫날,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설거지도 끝냈는데 시간이 남았다. 둘째에게 비문학 국어 문제를 설명해 주다가 집에서 나왔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 컴컴한 저녁 시간에 병원에 가려니 기분이 울적했다. 방사선 치료실 입구에 다다르니 8시였다. 너무 빨리 왔나? 전에 받았던 안내지를 꺼내서 다시 읽는데 ‘20분 전 치료실 도착’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문구에 형광펜으로 동그라미까지 쳐 있는데 처음 보는 기분이 들다니… 본 것을 까먹는 건 일상이지, 헛것을 보는 지경은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나를 다독였다. 나는 1,2 치료실에 배정이 되었다. 접수를 하고 탈의실에 들어가 상의를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간호사에게 방사선 치료 후 바르는 크림에 대한 설명을 듣고 5분쯤 대기했다. 이름이 불려  ‘통제구역’에 들어갔다. CT 촬영실보다 좀 더 큰 공간에 방사선 치료기가 있었다. 


방사선사들의 안내에 따라 가운을 풀고 기계에 누워서 자리를 잡았다. 처음 방사선 치료에 대해 안내를 받을 때, 치료선이 지워지지 않도록 상반신을 씻지 말라는 말을 듣고 기겁을 했다. 한여름이었으면 정말 고역이었을 것이다. 8일 동안 물과 비누가 닿지 않은 몸을 드러내기가 난감했다. 물수건으로 겨드랑이라도 닦아볼까 했지만 시퍼런 선이 관통하고 있어서 일찌감치 포기했다. 방사선사가 내 허리를 잡고 몸을 살짝살짝 밀었다. 나는 누워 있어서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지만, 기계에서 나오는 레이저 선에 몸에 그려진 기준선을 맞추는 듯했다. 피아노 연주곡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더니 기계가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고 기다리고 자세를 잡는 시간을 제외하고 오직 방사선을 조사하는 데만 걸린 시간은 길어야 2분이 될까 말까 했다. 기계가 움직일 때 나는 소리를 제외하고 오감으로 감지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 암세포들은 보이지 않는 타격에 화들짝 놀랐겠지? 


신발을 신고 나가려는데 방사선사가 내일부터는 저녁 6시 10분에 오시라고 했다. 이번에는 내가 화들짝 놀랐다. 저녁 6시라니! 가사육아노동자의 골든타임, 자식들이 목구멍이 보이도록 입을 짝짝 벌리는 둥지의 새끼 새들처럼 배고프다고 난리를 치는, 하루종일 최고로 정신없는 시간대에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올 수는 없었다. 그 시간은 도저히 올 수 없는 시간이니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로 변경해 달라고 방사선사에게 읍소를 했다. 빈자리가 나면 변경해 준다는 말을 듣고 병원을 나왔다. 방사선 치료실은 밤 10시까지 부지런히 돌아간다. 일터에서 퇴근하고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은 암보다 목구멍이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와 병원에서 처방받은 스트라타 XRT 크림을 수술 부위 주변에 발랐다. 방사선으로 인한 열상으로 손상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크림이라는데, 몸에 그어진 기준선에서 0.5cm  간격을 두고 바르라고 했다. 지금까지 한 푼이라도 아끼는 보람으로 살면서 나만을 위해 5만 원이 넘는 크림을 사 본 적이 없었는데, 드디어 오늘 샀다. 용량이 달랑 20g이라 앞으로 18번을 바를 수 있을지 긴가민가했다. 치료 종료와 함께 딱 떨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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