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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대한개츠비 Jan 30. 2018

[타인의 고통]-나와 타인의 고통,  그 간극에 대하여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에 노출되어 있다. 사진, 방송, sns 속 수많은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사유할 시간도 없이 실시간의 숏(shot)을 퍼붓는다.  그 이미지와 실제 사이에 상당히 큰 간극이 존재함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중 '사진이라는 이미지'와 '우리의 실제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를 수전 손택은 차분하나 열정적인 목소리로 풀어나간다. 
  허나 이 책이 사진의 이미지를 다루기 위해 쓰인 것은 결코 아니다. 저자가 서문에 밝혔듯 이 책은 전쟁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풀어가기 앞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사진은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주는가?". 만약 이 질문에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님 반대 의견이라면? 
  저자는 책 속에서 위 질문에 대해 절대적으로 '아니다'라는 답을 내린다.  그 원인으로 우리가 사진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 내지는 착각 아니면 환상에 초점을 맞춘다. 

   많은 사람들은 사진이 어떤 사건(책에서는 주로 전쟁을 다룬다)에 대해 증거로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힘은 그 이미지(사진) 제작자의 주관성이라는 문제를 교묘히 회피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사진은 어느 한순간의 이미지만 포착할 뿐, 그 뒤에 서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주관성의 개입이 너무나도 많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면 책 속 다음 구절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p.74)
  또한 사진 이미지는 제작자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을 가능성 더 나아가 반영되지 않을 가능성까지, 현실 그대로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을 확률이 생각보다 아주 높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진에는 너무 많은 운이 작용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부분을 간과함으로써 '사진에 관한 한, 모든 사람들은 전혀 융통성이 없는 사람들이 된다'(p.75)는 수전 손택의 말은 그 타당성을 더해간다.

  이제는 우리가 의심할 여지없이 신뢰했던 '사진 이미지와 우리 현실과의 간극'이 존재함에 대해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간극이 왜 발생하고 어떻게 강화되는지 살표 보자. 먼저 책 속의 다음 문장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 예술은 지옥의 묘사를 통해서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충족시켰다."(p.65),
  "의도했든 안 했든, 나머지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p.68)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은 오랫동안 종교의 통제하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종교는 예술작품들을 통해 믿음이 없는 자들(타인)의 고통을 믿는 자들(나 자신)의 욕망과 연결하고 또 대조시킴으로써 특유의 목적을 달성해왔다. 또한 종교적 사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유가 바로 이와 같은  고통의 관점, 즉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점이다. 이 관점은 고통을 희생에, 희생을 정신적 고양에 결부시켜 왔다.(p.149~150)
  그렇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욕망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자신과 철저히 분리된 것으로 생각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자연스럽게 '타인의 고통'과 '실제' 사이의 간극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을 예로 한 다음의 구절에서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다. 
  "피사체가 우리에게 더욱더 친숙할수록 사진작가는 훨씬 더 신중해지는 법이다"(p.98).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 구절은 어떠한가.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이면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p.107). 어떤 사진이든 사실을 정확히 반영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이 환상에 불과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을 찍는 자와 찍히는 자의 유사성, 유대 감등이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에 그 둘 사이의 간극이 발생한다. 그렇기에 사진은 실제가 아니다.

  그럼 이제 이러한 사진 이미지를 접하는 또는 소비하는 우리의 감정을 살펴보자. 책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사진들 속에서 대체로 두 종류의 감정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하나는 '공포'(두려움) '혐오' 다른 하나는 '연민'. 여기서는 이미지가 주는 감정이라는 부분에만 한정하여 이야기해보자.
  먼저 '공포'라는 감정. 책에서 예를 들었듯이 담뱃갑 앞면에 찍힌 여러 가지 이미지들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긴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숙해지고 그 크기도 점차 옅어진다는 것. 그렇다면 사람들이 공포에 떨기를 원할까? 그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우리가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의 뇌가 본능적으로 그런 공포를 걸러내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연민'이라는 감정. '연민'이라는 감정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연민'이라는 감정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자동반사적이고 기계적인 감정에 머문다거나 '우리 자신은 그런 고통(타인의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아'라는 자위적 의식을 강화하는 데 사용된다면 이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와 실제의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확장되는지, 그것을 우리는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 깊이 느껴갈 때쯤 약간의 답답증과 함께 이런 궁금증이 올라온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대답도 수전 손택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바로 다음과 같이!
  "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반응일지도 모른다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다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p.154)
   
  책은 대체적으로 전쟁에 대한 이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전쟁이었을까? 이미지와 실제 사이의 간극을 설명할 다른 주제도 많았을 터인데.  나는 두 가지 관점에서 저자의 결정에 동조하고 싶다. 
  하나는 우리가 다른 세계(국가)를 인식하는 방식은 오늘날에도 대체로 전쟁이기 때문이다. 국제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대부분도 전쟁 아니던가(물론 요즘은 테러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하나는 전쟁(군대)이라는 것이 '인간성의 상실'을 가장 여실히 그리고 근원적이며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타인의 고통'을 유발하고 그것에 침묵하며 방관하게 되는 것. 그것이 전쟁의 실체니까.
  
  마지막으로  책에 대한 내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본다. 
  나와 너의 고통이 다르지 않다는 것. 타인을 연민할 권리는 없다는 것.  타인의 고통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것.
  
p.s.  처음 부분에서 이 책은 전쟁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이 책을 다 읽은 분이나 아님 이 서평 정도만 읽은 분들이라도 수전 손택의 다음의 말에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특히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자유입니다."(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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