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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엣지정 Feb 10. 2024

곧 죽을 거니까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살아

어떻게든 된다


.'어떻게든 된다'라는 생각은 젊은이와 노인의 것이다. 젊은이는  '앞날을 개척해 나갈 거니까 '어떻게든 된다'라고 생각하고 노인은 '곧 죽을 거니까 어떻게든 된다.'라고 생각한다.

<곧 죽을 거니까> P.330 발췌


쉬운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다가 두 권 다 생각보다 생각할 게 많은 소설이었다. 물론 나는 < 곧 죽을 거니까>의 세대에 가깝다. 정치적 사회적 인간적 상황 속에 내 정체성을 생각하고 갈등하기보다는 살아온 날들의 결과물을 바라보며 잘 버텨옴을 대견해하거나 체념하며 사는 쪽이란 말이다.

둘을 비교할 뜻은 없지만 주로 30대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보다 곧 팔순이 되는 노인(?)이 주인공인 <곧 죽을 거니까>의 분위기가 훨씬 통통 튄다. 그렇다고 결코 가벼운  아니다.  목을 마치 하나처럼 연결해도 은근히 어울리는 <죽을 거니까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 다른  울림이 있다.


 단편 7편 중 여섯 편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여자가 주인공이다. 권여선 소설 최은영 작가의 작품을 평하면서 그녀에게 뭔가 다른 것을 는데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바로 이것을 바라왔다고 썼다. 가 다른 , 내게는 글을 읽는 내내 답답하고 편치 않은 무엇이 있었다. 

늦깎이 대학생 희원과 시간강사 그녀의 이야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해진과 희영, 읽고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 <몫>, 정규직 지수와 인턴 다희이야기 <일 년>, 소아성애자인 학교교사와 결혼한 언니, 조카가 태어나고 이모로서 역할을 하면서도 그 이상한 가정에 힘들어하는 

 요리사 동생의 이야기 <답신>. 외삼촌에 대한 성숙하고 사려 깊은 생각을 가진 딸 소리와 소라엄마 이야기 <파종>. 냉혈한 모를 닮은 조종사인 희진, 서울대 출신의 아빠이야기 <이모에게>. 어릴 적 남의 집살이로 려진 주인공 기남과 전처자식 진경과 친딸 우경의 이야기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등 총 일곱 편이다.

양경언 문학평론가는 최은영의 인물들을 작고 연약하게 느끼지 말고 우리에게 있는 그 면을 작가가 잘 포착한 것이라고 했다. 그럴 수도 있다. 세상에는 배우거나 그렇지 않거나 가지거나 그렇지 않거나 종속적이고 비자립적인 삶을 사는 여성들이 많으니까. 또한 그녀는 종국에는 모든 주인공들이 변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말하지 않았다.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거나 모른 척하고 묻어두는 것을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좋은 방향으로 해소되는 결말을 보이지도 않는다. 힘들고 답답하다.


<곧 죽을 거니까>는 책 제목만으로도 어딘가 반전을 기하고 만든 거란 인상이 깊다. 이 말은 곧 죽을 거니까 하게 될 자기 방치에 대해 경계하고 탈출할 것을 요구한다. "직장과 묘지 사이가 긴"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곧 죽을 거니까란 말로 매사에 소극적이기보다 나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것을 충고한다.  주인공은 '내추럴(자연스러움)'이나 '내면'이란 단어도 극도로 싫어한다. 그걸로 대변되는 것은 게으름이라고도 한다. 생각해 보니 맞는 거 같다. 최근 들어 나는 "이제 욕망도 없고 그래서 어떤 것에도 집착이 없다"라고 누누이 말해왔다. 잘 차려입고 가꾸는 것이나 이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 등을 천박한 욕망으로 치부했지만 그 또한 공부하는 만큼이나 부지런해야 되는 일이며 욕망이나 집착이 결코 폄하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

 남편이 죽은 뒤 40여 년 동안 두 집 살림에 혼외자까지 둔 걸 안 주인공이 보살이 되어가는 끝부분은 좀 억지스럽기도 했다. 주인공 오시 하나를 20년 가까이 젊어 보이는 외모에 내면의 미까지 두루 갖춘 완벽한 노인으로 만듦으로 일반인들과 괴리감을 느끼게 만든 것도 현실적이진 않았다. 첩의 가족, 최고 엘리트 그룹인 의사 (?)과 유능하고 잘 생긴 건축설계사지만 사회사업과 봉사에 가치를 둔 이상적인 릭터를 혼외자로 설정하고 결국 본처에게 정신적 도움까지  받는다는 전개는 지나치게 드라마틱했다. 그들이 유쾌하게 눈물주를 마시는 마지막 장면은 유치하여 오글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을 독백형식으로 그려내면서 여지없는 속물로도 묘사함으로써 의외의 반전 매력을 선사하기도 한다. 시어머니나 본처로서 하물며 엄마나 할머니로서도 세속적이고 저급한 생각을 서슴지 않고 표현한다.

외모를 가꾸듯 후천적 노력으로 생각을 바꿔가는, 더 정확히는 외모를 찬사 받기 때문에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지가 발현되고 그 의지는 그녀에게 여유를 만들어준다. 인내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늘 좋은 결과를 얻는 우연을 제공받기도 한다. 예컨대 시종일관 무시하고 미워하던 며느리와의 줄다리기 중에도 마지막 자존감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함으로 결국 그녀에게서 이쁜 구석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정서와 비슷한 면이 많아 더 공감했고 잘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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