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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kDolphin Jul 16. 2019

여기서 인생을 손절할 수 있을까

익절과 손절 사이, 망설이는 우리들에게

"변호사 자격증에 인생이 물렸다."


대학교 동문 웹사이트에 누군가 이런 글을 올렸다. 제목만 읽었을 뿐인데 머리가 띵-했다.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로스쿨에서 성적도 괜찮았고 좋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도무지 법학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 글에 공감하는 치과의사, 회계사 같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동문들의 댓글도 적지 않았다. 물론 댓글의 과반수 이상은 '다른 데 가면 더 힘들다. 아직 어리고 변호사 자격증 있으니 잠깐 다른 거 해보던지.' 하는 위로와 조언이었지만.


"물렸다"라는 표현이 언젠가부터 주변에서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주로 주식 등 투자를 할 때 시세보다 훨씬 높은 고점에서 매수해 손발이 묶여있는 상황일 때를 일컫는 말이다.


눈물을 머금고 손절을 하거나, 시세가 오르기를 기다리는 '존버족'이 되어 익절을 하는 상황만이 유일한 탈출구다. 그리고 이 표현은 점점 주식 시장을 벗어나 슬그머니 우리의 삶에도 침투했다.


동문 커뮤니티 게시판에 "인생이 물렸다"라는 키워드로 게시글을 검색하자 수십 건의 검색 결과가 나왔다.


"우리 학교 이름값에 인생이 물렸다."

"고시 공부에 인생이 물렸다."

"결혼에 인생이 물렸다."






'손해'를 받아들인다는 것

 

사회 초년생이 되어 모은 월급으로, 나는 처음으로 주식 시장에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경험이 자산이라는 패기 어린 마음으로 나는 시장과 맞짱 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내가 말로만 듣던 개미 군단의 한 마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손절'을 처음 하던 날, 하루 종일 머리가 멍했다. 분명 내가 구매한 가격 이상으로 판매하는 것이 정상이거늘, (중고나라도 아니고 말이다)


손절이라는 결정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매일 회사에 앉아 눈이 빠지게 일하며,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지하철에 끼어 들어가며 번 돈이 이렇게 허망하게 날아갈 줄이야.  


눈물의 손절을 한 이후, 가장 골치 아팠던 건 내 삶의 모든 기준이 내가 감수해야 했던 손실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 집에서 13년을 함께한 냉장고가 망가졌다.


새로운 냉장고를 구매해야 한다는 AS 기사님의 말에 상품 가격을 찾아보니, 아뿔싸. 내 손절액이 새로운 냉장고 가격과 맞먹었던 것이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손해만 안 봤어도 새 냉장고 하나쯤은 장만했을 돈인데.'


냉장고 쇼핑을 하면서도 나는 내내 속이 쓰렸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손해액이 메꿔질 때까지 이런 현상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얼마 전, 가족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떠나는 길에도 '손해만 안 봤어도 그 돈으로 우리 부모님 여행 2번은 더 보내드렸을 텐데.'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 괴로웠다.


모든 삶의 기준이 내가 손해를 봤다는 사실로 맞춰진다는 것이 속상했고, 누군가는 손해를 훌훌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가는 반면 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 속상했다.


전재산을 날리거나 빚더미에 앉는 상황에 비하면 내가 잃은 금액은 그렇게 크지 않지만, 직접 내린 선택에 따른 손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사실은 곧 죽어도 손해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손해가 수익으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존버족'이 될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오르지 않을 시세를 매일 초조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 누군가가 자랑하는 수익률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망상에 잠기는 것이 날마다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내가 손해를 봤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누군가가 그랬던가, '수익이 나고 있더라도 손에 쥐기 전까지는 진짜 수익이 아니'라고. 손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투자 실패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이건 진짜 손해가 아닐 거라 믿었다. 애써 눈을 돌려 다른  곳에 신경을 팔거나, 마냥 앉아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 믿었다.


나날이 더해가는 스트레스와 내 한숨에 붙은 가격표가, 실제로 감수해야 하는 손해액을 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기서 인생을 손절할 수 있을까


초보 개미 투자자의 손절도 이렇게 속이 쓰린데, 인생의 손절은 얼마나 고된 일일까. 물론 세상에 똑같은 인생은 없기에, '내 인생의 적정가와 손절 구간은 어디인가'에 대한 생각도 제각각일 것이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은 대체로 인생의 적정가를 '국내 명문대 졸업 후 전문직/대기업/금융권/학계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엘리트 코스' 어드뫼에 두고 살아간다. 물론 많은 이들은 목표를 달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문제는 인생의 상한가를 달성했음에도 행복하지 못하는 이들 역시 많다는 거다.


타인의 눈에 비친 모습은 완벽해 보이지만, 마음 한가운데가 힘없이 푹- 꺼져있는 듯한 날들이 계속되면, 문득 이런 생각이 고개를 드는 날이 있다.


'이쯤에서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걸 내려놓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까?'


인생에서의 손절은, 이미 무시하기엔 너무 커져버린 상실감과 후회를 받아들이고 이를 만회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나와 맞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마음은, '딱 여기까지야'하고 선을 긋는다고 해서 그 선 안에만 머물러있지 않는다.


그 생각은, 풍선처럼 점점 커지다가 결국 우리를 잡아먹는다. 매일의 일상을 '내가 다른 인생을 살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과 후회 속에 살게 만든다.그리고 지금의 삶을 살기 위해 쏟아부었던 모든 노력과 시간을 더 부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워진다. 대학원 자퇴를 앞둔 내 마음이 그랬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또 한 번 속 쓰린 고민을 하고 있는 지금 내 마음이 그렇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몸이 위험 신호를 보낼 때 즈음, 안되겠다 싶어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그리고 유독 한 문장을 쓰고 난 뒤 눈길이 맴돌았다.  


돈이건 직장이건 손절을 하고 난 뒤에 돌아서서 할 생각은,
'나 손해 봤구나'가 아니라, '손해를 여기에서 멈췄구나.' 하는 생각이다.


그래, 손절의 진짜 의미는 손해를 본 것보다, 손해를 멈출 용기를 낸 거다. 하지만 손해는 늘 그렇듯이, 내 통제 밖에 놓여있다. 이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문제는, 그 손해를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혹은 언제까지 버틸 것인가 하는 문제다.


헛된 일에 내 시간과 노력이 지나치게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을 멈출 용기가 났다면, 멈추면 된다. 멈추지 않고 손에 쥐게 되는 손익은 그 누구도 아닌 모두 자신의 몫이다.


때로는 잔인한 삶의 순리 앞에서 내가 마지막 날 가져갈 것은, 상처 입으며 전전긍긍하던 기억보다 그 앞에 당당히 서서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은 나의 용기였으면 한다.


학교에, 직장에, 인간관계와 결혼에 '인생이 물린 것 같은' 모든 이들이 물처럼 밀려오는 후회에 흠뻑 잠기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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