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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가의 나라 Mar 08. 2024

파리장서를 처음 읽어보았다(Ⅰ)

역사책의 한 줄은 뭇사람들의 생명을 건 분투였다.

  물론 여러 가지 환경적인 어려움은 비켜두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수하게 바라볼 때, 나는 내가 하고 있는 기록관리라는 이 일이 좋고, 이런 일을 만난걸 참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그 기록이 잘 관리되어 누군가에게 예쁘고, 귀한 것이 되기를 바란다. 기록전시를 하면서 그 예쁘고 귀한 시간들을 잠시 맛보았다.

  3.1절 기념 기록전시다.

  3.1 운동에 관한 우리나라 전체적인 기록과 전시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 "경남"과 관련된 3.1 운동 혹은 독립운동 관련 기록은 내가 아는 한 적고, 전시는 없었다.

짧은 시간 전시를 해야만 하는 부담감은 있었다. 다만 다행인 건, 2019년 (내가 시작은 했으나, 인사발령으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경남 근현대사 기록물 수집사업의 결과물인 "경남 독립운동의 기록"이라는 책자가 있었기에, 전시는 가능했다. 물론 그 책자에 나온 사실과 다른 기록을 봤을 때 차이점이 보였으나, 그것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일부 사실이 아닌 것만 바꾸고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글은 전시만이 아니라,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경남의 3.1 운동 전반에 관한 글이다. (해당 글은 전시를 한 내용을 기초로 작성되었으며, 전시되지 않는 내용은 경남신문 등을 참고했다. 그리고 전시에 참고된 신문자료인 매일신보는 경남도민일보/2024. 2. 29./"1919년 전국서 울린 만세 소리... 당시 언론은 "소요 사태" 폄훼"라는 글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다만, 그 자료가 일부 사실이 아닐 수 있으나, 3.1 운동 기록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때를 증언해 줄 자료가 많지 않음을 양해 바란다. )



   주제, "독립의 길, 기록으로 꽃 피우다"

   #3. 1 운동과 경남

경남의 각 지역별 3.1 운동 관련 전시 전경(경남도청 신관 대강당 앞)


#1. 3월 1일  한용운 등 민족대표는 태화관에서,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3월 1일 정오경부터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길선주 · 김병조 · 유여대 · 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최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安淳煥)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나서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였다.

이 통고를 받은 일본경찰대 80여 명이 즉각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이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를 들은 후,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의연하게 일본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도쿄에 밀파된 임규(林圭) · 안세환(安世煥) 등은 뒤에 일본 정부와 의회에 독립선언서 등을 우송하였다. 상하이에 밀파된 김지환(金智煥)은 윌슨과 파리강화회의의 각 대표에게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송신하였다.

이 무렵 탑골공원[이칭별칭: 탑동공원(塔洞公圓)]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학생 4,000∼5,000명이 몰려와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강기덕(康基德) · 김원벽 등의 연락을 받고서 오전 수업을 마치자 곧 학교별로 달려온 것이었다.

오후 2시가 되자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청년이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거의 끝날 무렵에 학생들은 모자를 하늘로 날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종로 쪽으로 뛰쳐나와 시위행진에 들어갔다.(이상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2.  경남의 3.1 운동, 전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가장 격렬하게,  수만 명의 시민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일부 기록(경남도사, 신문기사 등)과 수치는 차이가 있음

  


#2-1. 1919. 3. 3. ~ 4.22. 까지 경남에서 3.1 운동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경남 독립운동의 기록(경상남도기록원/2019)


                                  

#2-2. 전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경남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인구가 가장 많던 경기도를 제외하고 남쪽에서 가장 많은 군중이, 가장 오랫동안, 가장 격렬하게, 그리고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곳이 경남이다.

173회의 시위, 시위참가 인원 10만 명, 사망자 81명, 부상자 233명, 잡혀간 사람 754명이었다.(경남도사)

농민, 유생, 학생, 기생, 걸인, 상인, 공무원, 기독교인, 불교인 등의 경남의 많은 사람들이 해당 시군 장날과 연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외쳤다. 경남 사람들은 간절히 대한의 나라의 독립을 기원하고 희망했다.

전시를 하면서, 나는 그 희망, 기대, 슬픔, 공포, 분노, 외면, 고통,,, 그리고 전진의 소리를 들었다.



#2-3.(창원) 경남의 독립운동의 시작은  1919. 3. 3. 경남 마산 두척산(무학산)이다.

 김용환 지사는 마산 무학산에서 이태왕전하(고종) 국장요배식에 참석한 군중에게 조선독립선언서 20장을 살포한 뒤 수백 명의 군중 속에서 단독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원본자료로 살펴보는 3.3 만세사건과 김용환 지사(박영주/2023. 2. 27.)


창원(마산, 진해)에서는 3월 3일부터 4월 22일 마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가 이어졌다.

1919. 4.3. 오전 9시 변상태의 연설이 이어졌다.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민족이며 자유국의 국민이다. 일본의 관여는 추호라도 받아서는 안된다.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시위행렬은 진동으로 향했고, 최소 3000~8000명의 민중들이 의거에 동참했다. 당시 마산부 거주 조선인이 총 1만 명 정도였다. 이 날 시위에서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보앙주, 이기봉, 김호연, 홍두익 8명이  숨을 거두었다. (경남신문/2019/4.3 삼진의거)


진전면 군중 수천 명이 태극기를 들고 시위 참여, 7명 즉사/매일신보/1919.4.7./국립중앙도서관

           


#2-4.(진주) 서부경남의 대표 시위, 3만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다.

3. 18. 진주읍, 진주장날 기생, 걸인, 학생, 노동자, 농민 모든 계층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만 명의 군중은 서울 다음으로 큰 수치다.  

진주는 도청소재지로 진주 장날 등에 인근의 산청, 사천, 하동, 삼천포, 남해 지역 주민들이 모이는 거점 지역이었다. 때문에 진주 3.1 운동은 진주에 국한되기보다 서부 경남을 대표하는 시위로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 부분을 차지한다.(경남신문/2019/전국 두 번째 규모 만세시위 진주)

                     <기생 앞서고 소녀가 따라, 주모자 6명 체포>                       매일신보/1919.3.25./국립중앙박물관



#2-4. (통영)동포에 격하노라

1919년 3월 통영, 스물두 살의 진평헌은 경성(서울)의 3·1 운동에 참여한 뒤 고향에 내려와 만세시위를 준비하다 ‘독립선언문’을 구하지 못해 직접 3.1 운동 격문을 쓰게 된다.

또한 통영지역 예기조합 기생 33명은 금비녀와 금팔찌를 팔아 소복차림으로 시위대에 참여했다.

                통영의 3.1 운동 격문(동포에 격하노라)/국가지정기록물 제12호/출처 독립기념관

*괭이 들고 산에 간 내 형제여, 그물 들고 바다로 간 내 동포여, 기심 뜯던 들판에서 배 짜던 베틀에서 내 누이여! 큰 거리로 나오려무나... 우리에게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다오(격문 내용 중)



#2-4. (사천)독립 운동의 산실 "사천" 3개대로 나누어 독립만세를 외치다   

사천 곤명면 봉명산 자락에는 1500여 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고찰 다솔사가 자리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앞서, 이곳 요사채 안심료에 머무르며 독립선언서 초안을 집필하며 공약 3장을 덧붙였다. (경남신문/2019/독립운동 산실 사천)

3월 25일 삼천포 장날, 삼천포공립보통학교 제2회 졸업식, 사천에서는 3개대로 나누어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1대는 학생, 2대는 청년, 3대는 시민 중심으로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1919. 3. 25. 공포로 해산, 주모자들 체포>   매일신보/1919. 3.  30./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2-5. (김해)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배동석, 하계면 서기 김우현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군중들은 외쳤다.

김해 동상동 출신인 배동석(1891∼1924) 지사는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 의대) 학생으로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 만세시위에는 학생 대표로 참가했다. 이후 배 지사는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김해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김해 동상동 시장에서의 첫 만세운동 이후 일본군에게 체포됐으며, 1920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배 지사는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 손톱과 발톱이 뽑히는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1924년 젊은 나이로 서울에서 사망했다. (경남신문/2019/들불처럼 만세운동 일어난 김해)

3. 31. 진영장날을 시작으로 4. 12. 장유면 무계시장으로 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매일신보는 1919년 4월 18일 자에 장유 만세운동을 ‘김해의 폭동’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장유지역 만세의거는 김승태의 어머니 조순남 여사가 직접 작성한 내방가사 ‘김승태만세운동가’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경남신문/2019/들불처럼 만세운동 일어난 김해)

<김해의 폭동(3천 명이 헌병 주재소를 급습)/매일신보 1919. 4. 18..>



 #2-6. (밀양)그들은 산 위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새도록 징과 북을 치면서 만세를 불렀다.     

 밤새도록 징과 북을 치는 기독교 신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이 글을 읽고 가슴이 아팠다. 간절한 그들의 염원이 들렸다. 해당 책자에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표충사, 통도사 승려도 만세시위를 일으켰다고 한다. 신을 향한 독립에의 염원, 울부짖는 1919년 4월 6일의 밀양인들의 소리가 지금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3월 13일 윤세주, 윤치형의 주도로 시작된 밀양 장날 시위를 시작으로 4. 6일 평양에서 이주해 온 기독교 장로들의 시위까지, 밀양의 시민들은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다.

     <3. 13. 밀양장날 수천 명이 끈기 앞세우고 시위, 7명 체포> 매일신보/1919.3.15.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2-7.(거제)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느냐 묻자, "일심(一心)"이라 적는다.

거제에서 발생한 두 차례 만세운동으로 1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구속돼 고초를 겪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모진 고문에도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며 버텼다.

1919년 4월 21일 법원에서 윤택근은 징역 1년을, 이인수와 이주근은 징역 8개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윤택근과 이인수는 대구형무소에서, 이주근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주종찬은 1919년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는데, 판사가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느냐’고 묻자 즉석에서 손가락을 깨물어 ‘일심(一心)’이란 글을 써서 판사에게 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주종찬의 행동에 재판이 중단되기까지 했다. 주종찬은 대구형무소에서 나와 거제로 돌아왔지만 고문 후유증과 심한 나병으로 국산마을 뒷산에서 움막생활을 하다 1933년 8월 23일 세상을 떴다.(경남신문/2019/거제)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이런 짧은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1분 만에 읽은 이 글 앞에 숙연해지는 건, 이건 그들의 생명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가 내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네"라고 할 자신이 없다. 나는 나라의 독립보다 나의 가정을 나의 안위를 더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는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분들의 희생 앞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고문을 당한다면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일을 말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만큼 "고문을 당했다"라는 이 의미는 6개 글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손톱밑에 가시가 늘 아프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이런 글이라도 쓰고 싶었는지 모른다.

4.3 거제 아주 장터 만세시위 주모자 윤택근, 이주근, 이인수 등 판결(매일신보/1919.5.29.)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2-8. (양산) 통도사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앞장서다.

3.29일 통도사 부속 보통학림 및 지방학림 학생 김상문 등은 신평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통도사에서 운영한 지방학림과 서울 중앙학림 학생은 불교계 대표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통도사 지방학림 출신으로 서울중앙학림 유학생이었던 오택언은 한용운의 밀명을 받아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여한 이후 독립선언서를 갖고 5일 통도사로 내려온다. 통도사 지방학림 학생대표 김상문, 통도사 강원 승려 등과 13일 신평장날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오택언은 7일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히지만, 거사는 만우스님을 중심으로 차질 없이 진행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경남신문/2019/충렬의 고장 양산)

3. 27. 양산읍 장날 의거를 시작으로 4.1. 까지  시위는 계속되었다.

3. 28. 2천여 명 만세시위, 주모자 체포 후 군중들 군청 습격(매일신보, 1919. 3. 30.)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 이상 경상남도 시부의 독립운동 이야기다.

기록전시는 일반 전시와 달리 내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한자 같은 경우, 그림으로 보이지 않도록, 그 내용이 전달되도록 하는 게 기록전시라 생각한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전시에 많은 말이 들어간다. 그래서 복잡해 보일 수 있다. 두 번의 전시를 거치면서 그 문제(많은 글)에 대해 고심했지만, 결론은 기록전시는 기록이라는 매개체로 이야기가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그 많은 글을 어떻게 요약하여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여전히 숙제다.


전시하는 것도, 전시를 정리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독립을 염원한 그분들의 노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뒷장에 설명을 할 것이지만, 전시장에 경남의 독립운동가 이름을 적은 현판을 달아두었었다. 나에게 그 이름은 이름이라기보다는 그림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분들의 후손들은 그 많은 이름 속에 조상의 이름을 찾고자 흐린 눈으로 그 작은 글씨를 눈이 아프도록 찾아다녔다. 그때 나는 알았다. 독립운동을 겪지 않는 사람, 그런 분을 조상으로 두지 않은 나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분들에게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아주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 알아가는 거 같다.


다음은 경상남도 군부의 3.1 운동이야기가 될 것이다. 좀 더 공부해서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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