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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Dec 30. 2022

우리는 어떻게 내가 되는가

아니 에르노 <여자아이 기억>을 읽고

이 세상의 사람들을 한 가지 잣대로 두 부류로 나눈다면 이건 어떨까? 모든 경험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사람과 그 경험을 어떻게든 붙잡고 이름을 붙여주는 사람.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쓰는 자와 안 쓰는 자. 혹은 아직 안 쓴 사람과 이미 쓴 사람.


나는 아직 안 쓴 사람에 속한다. 언젠가 쓰게 될지 모르지만 그건 희미한 예감과 같을 뿐이다. 지금까지 나는 매번 실패해 왔다. 그것에 어떤 옷을 입히고 무어라 부를지 실마리를 찾는 단계에서 매번 뒤돌아서고 말았다. 언젠가 적절한 때가 오리라 기대하면서. 결국 그때는 시작하지 않으면 결코 오지 않으리란 걸 매 순간 느끼며.

시작이 어떻게 풀릴지 알 수 없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오늘도 매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아니 에르노의 <여자아기 기억>은 한 인간을 만들어 가는 수많은 사건 중에 ’ 수치심‘이란 기억에 얽매인 사건을 현재 시점에서 끊임없이 되짚어가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과거의 특정 시점에 경험했던 일들을 우리는 그보다 더 전에 일어난 경험을 바탕으로 받아들인다. 선형적인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이다. 인생의 사건들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많은 경우,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할 때 그것의 의미까지 가닿지 못한다. 정확하게는 의미를 생성하지 못한다. 말 그대로 경험할 뿐. 시간과 경험이 쌓이고 사건과 사건 사이의 연결고리들이 희미하게 빛을 낼 때, 그제야 비로소 경험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탐색해나갈 수 있다.


단식과 폭식을 거듭하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한 시점에서 섭식 장애, 폭식증이란 단어를 알게 된 시점까지.

처녀성에 대한 집착과 광기에서 벗어날 작은 동아줄을 잡기 시작한 시점의 전과 후.


이 책에서 아니 에르노는 과거 한 시점의 여자아이를 자꾸만 불러내 종이 앞에 세운다. 여러 시점에서 그 여자아이를 되돌아본다. 그때 그 시절 여자아이가 보낸 편지 속 이야기부터, 그로부터 10년 후에 맞이하게 될 혁명적인 사고의 전복으로, 5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바라보는 모습까지. 우리의 기억이 그렇듯, 그렇게 되돌아보는 모습에도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아이에 대한 기억에 자꾸만 다른 목소리들이 섞여 들어오기도 한다. 모든 글은 회고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내가 쓴 글도 결국 과거의 시간 속으로 자꾸만 밀려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 수밖에 없다. 글을 씀으로써 과거의 여자아이는 누군가의 기억 속 보잘것없는 엑스트라에서 자신의 삶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내고 결국 다른 존재, 그러니까 쓰는 존재, 서사와 맥락을 가진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이 책의 곳곳엔 쓸 수밖에 없는,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내가 되었는지 알아가는 작가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오늘날의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기억이다. 그 기억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일 수 없다. 기억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름 붙이느냐에 따라 비로소 기억이 만들어진다.


+ 덧. 이 책을 읽으며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여성 작가여서가 아니라 뒤라스 역시 경험을 글로 씀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삶을 써 내려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재현이 아닌 발경해 나가는 글을 추구했던 사람이었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다를지언정 그들이 글을 쓰는 이유, 글로써 추구하는 방향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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