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와 강원도 경계점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고성과 속초경계점에 도착했다. 경계란 단어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어떤 기준에 의해 나누어지는 한계나 구별을 뜻하는 경계(境界)와 조심하거나 살펴 지키는 경계(警戒)이다. 이처럼 한국어는 동음이지만 뜻이 완전히 다른 이의어는 한자표기로 구분될 수밖에 없는데 불행히도 나는 한자를 잘 모른다. 그래서 눈치껏 문맥에서 때려잡거나 아님 검색해 분간하여 구별한다.
'우리는 한국어를 법전으로 쓸 수가 없다.(중략) 한글로는 할 수 없는 게 얼마나 많은가. 내가 사랑하는 한글을 폄하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모국어가 처한 운명을 정직하게 말하고 알아야 한다.(중략) 한글은 정말 우수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세계에 자랑거리다. 한국어는 아직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더 세련되고 다듬고 더 가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출처 : 김훈 작가 한림대 도헌학술원 특강 기사中에서)
얼마 전 다초점렌즈를 구매했다. 안경원에서 구체적인 설명을 들은 후 착용해서 적응 중이다. 다초점 렌즈는 간단히 말해 렌즈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도수가 다른 점이다. 따라서 렌즈중간에 경계가 생긴다. 눈을 아래위로 빙빙 돌리던지 고개를 위아래로 숙이던지 해야 시야가 초점에 맞게 들어온다. 근시(먼 거리를 보는데 어려움)와 난시(초점이 안 맞는 시력) 그리고 원시(가까운 거리를 보는데 어려움) 차이를 절충한 렌즈인데 안경원에서 정답은 없다고 한다.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어지러움증은 저절로 사라진다는 말이다.
렌즈 중간층의 경계는 과연 첫 번째 단어일까? 두 번째 단어일까? 모르겠다. 차이지점이니 첫 번째일 수도 있겠지만 시야를 조정하고 조심하는 함의라면 두 번째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초점렌즈는 누워서 TV 볼 때가 애매하다. 가만히 있질 못한다. 눈으로도 고개로도 잘 맞추기가 힘들다. 원래의 안경과 혼용하면 더 어지러울 수 있기에 혼용도 어렵다. 그래서 귀찮더라도 앉아서 TV를 봐야 한다. 다초점렌즈를 잘 적응하는 최고의 방법은 의식하지 않고 그냥 보이는 대로 볼 때가 제일 편하다. 의식하기 시작하면 고개나 눈을 움직여야 한다.
그냥 저절로 된다. 이 세상엔 만사 저절로 되는 것이 기본인데 자꾸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만사가 꼬인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경계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다들 바보가 아닌 이상 의식하지 않다도 사기꾼처럼 의심이 되는 것은 거기서 멈추고 외면하거나 거절한다. 그런데 의식을 멈추면 자연스럽게 경계가 풀리고 외면이나 단절이 아닌 관계가 형성된다. 이번 여행에서 깨우치는 것은 바로 기다릴 줄 아는 느긋함과 의식을 멈추는 것이다.
다초점렌즈처럼 의식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다 저절로 되는 그 단순한 원리를 이번 여행에서 굳건하게 각인해 본다. 강원도 고성과 속초의 경계는 느긋하다. 그저 행정상의 경계일 뿐 교류의 경계는 아니다. 지역이나 사물은 철저히 구분하고 경계의 필요성이 반드시 필요하나 사람과 그 정서적 형상은 칼로 물 베듯이 경계하지 못한다. 내일은 해안선을 따라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지나갈 것이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인 수평선은 엄밀히 말하면 보이는 이의 허상일 뿐 경계의 실체는 없지 않은가!
이제 첫 번째 경계(境界)는 적절하게 의식하고 두 번째의 경계(警戒)는 의식하지 말자. 김훈작가가 말한 세련되고 더 다듬고 가꾼다는 것은 정서적 성질적 한국어를 과학적 정량적 한글처럼 합리적으로 승화시키자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번째 경계는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마음먹기에 따라 너무 다르게 다가온다는 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나름 재미있는 세상 같다'라는 전(前) 팀장님의 말이 되새겨지는 오늘이다.
- 2023년 10월 5일 스타벅스 소노델피점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