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이머드 Jan 11. 2019

나쁜 메모법

나쁜 깜지

깜지를 아십니까?


어릴 적 유행했던 공부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흰 종이에 글씨를 빽빽이 써넣어 흰 공간이 보이지 않도록 글을 쓰는 것을 의미하는 데 보통 선생님이 학생에게 벌로 내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벽을 보고 손을 들고 있는 것처럼 의미 없고 단순하면서 고통이 따르는 작업이었으니까요. 저도 숙제로 깜지를 내주는 선생님을 싫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시험공부로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시험이 다가오면 교과서를 베끼거나 노트를 다시 쓰기 하는 친구였죠. 깜지에 적힌 글씨를 주변 친구들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알아보지 못했어요. 다시 읽지 못해서 무엇을 공부했는지도 모르는 거 아니냐는 질문에 쓰면서 외운다는 답변을 하더군요. 쓴다는 것에만 집중한다는 것인데 연필로 쓰다 보니 번진 흑연 가루 때문에 정말로 종이를 깜깜하게 만들던 그 친구는 성적도 깜깜했습니다.


반면, 전혀 글로 쓰지 않고 공부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제 짝꿍이었는데요. 이 친구는 시험 기간이 되면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면서 교과서를 외우기 시작합니다. 준비물은 이따금씩 끄적이는 작은 펜 하나와 암기할 교과서 한 권이 전부였죠. 해본 적이 없어도 보고 외우는 반복 작업은 확실히 쓰는 것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될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시험 시간에 그 친구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외울 내용을 제외하고는 머릿속에서 밀어내느라 독기를 품은 표정이었어요. 하지만 이 방법으로 이 친구는 1학년 1학기 첫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하게 됩니다.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이 방법으로 전교 1등을 하는 녀석의 암기법에 대해 관심이 갈 수밖에요. 어느 날 그 친구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왜 말하면서 그렇게 외우는 거야? 잘 외워져?"

그 친구가 말하길,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래"

어허, 참 겸손한 녀석이구나 그냥 넘어갔지만 그때 인터넷이 지금처럼 활발했다면 그 방법이 유태인의 하브루타 교육과 많이 닮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겁니다. ASMR이 가미된 하브루타 정도 되겠네요.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효율적인 암기법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의 잘못된 메모법이 쓰기만 하면서 공부하는 그 친구의 공부법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암기법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보통 아래 3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씩 자세히 관찰해봤어요.

1. 읽다. → 정보의 Input, 정보를 습득합니다. 반복하면 암기될 수 있으나 효과는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알고 있는 것을 꺼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2. 쓰다. → 정보의 복사, 정보를 복사하는 과정입니다. 다시 읽기 위해서 쓰거나 각종 다른 정보를 사용자 취향에 맞춰 재정렬 시 사용합니다. 암기에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3. 말하다. → 정보의 재해석, 암기된 정보를 끄집어내는 단계입니다. 시험을 보는 것과 효과가 비슷합니다. 반복하면 암기의 효과가 가장 큽니다. (그리고 보지 않고 쓰는 시험도 말하기와 비슷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에피소드로 비추어 볼 때 쓰기와 읽기는 정보의 수집과 이해 측면에서 활용하고 "내것화"하려면 말하기에 치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중요한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단순히 적어 놓기만 했다면 쓰면서 공부했던 친구와 같은 결과에 빠지기 쉽습니다. 적어둬서 언제든지 볼 수 있지만 다시 볼 시간도 따로 정해놓지 않고 방치해놓기 쉽죠. 이렇게 사라지는 아이디어가 한가득 있다면 정말 아쉬운 상황입니다. 좋은 아이디어는 많은 데 다시 기억하지 못하고 소모적인 메모만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메모를 매일 자기 전에 다시 그 메모를 볼 수 있도록 정해놓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메모하지 않고 깊이 자문하고 간격을 두고 반복하는 겁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그것이 잊혀질까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급히 메모할 수단을 찾게 되고 메모가 끝나면 안도하면서 정말 잊어버리게 되니까요. 뇌는 생각보다 쉽지 잊지 않습니다. 860억 개의 뉴런과 100조 개의 시냅스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더욱더 그 생각을 깊이 하고 왜 그런 생각이 중요하다고 느꼈는지 곰곰이 되뇌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더욱 탄탄한 기억 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일정 시간을 두고 다시 그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Notification을 설정해서 다시 그 해답에 대한 질문을 받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시간을 두고 다시 반복 회상할 때 학습효과가 크다는 것은 여러 논문에서 입증된 바 있죠.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이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고 해보죠.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4캔을 샀다. 가까운 거리이기도 하고 20원이 아까워 영하권의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봉지 없이 그냥 들고 나왔다. 그런데 정말 춥더라. 100M밖에 안 되는 거리도 천리처럼 느껴지고 눈앞이 깜깜했다. 20원을 아껴서 그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아껴야 잘 산다는 말은 적금으로 부를 늘릴 수 있었던 예전 시대에 해당되는 말이다. 시대가 불러온 고정관념일 뿐이다. 쓸데없이 아끼지 말자. 적은 금액은 마음껏 쓰자. 그렇게 해도 내 재정 상태에 0.1%도 미치지 못한다. 티끌모아 티끌이다.



 만약 이 경험을 통해 "적은 금액은 아끼지 말자"라고 적었거나 장황하게 위 에피소드를 적고 잊어버렸다면 다음 단계는 없을 겁니다. 이보다는 이 교훈이 주는 에피소드를 다시 되뇌어 보고 그 경험을 통해 어떻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투자는 Risk가 있을 때 가치 있다는 생각으로 전이될 수도 있고 저렴하게 구매하려고 쇼핑몰을 여기저기 뒤지고 2시간 동안 겨우 1,000원을 저렴하게 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이제 충분히 생각을 확장했다면 하루 뒤에 알림을 울리도록 설정합니다. 그리고 정확히 하루 뒤 핸드폰 알림이 뜹니다.

"어제 그 봉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다음날 봉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면 쉽게 그날의 에피소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날의 에피소드를 다시 입으로 이야기해봅니다. 친구 혹은 가족에게 말할 상대가 없다면 혼잣말도 좋습니다. 입 밖으로 꺼내보는 것은 그 기억을 더 견고히 합니다.


고백컨데, 저는 꽤 오랫동안 저런 교훈적인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적고 잊어버렸습니다. 적는 것이 나의 다음 행동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적고 나면 머릿속에 들어갈 거라는 그 친구처럼 저도 노트에 쓰기만 하고 다시 열어보지 않았으며 나중에 열어보니 똑같은 내용을 또 쓰는 우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메모는 우리의  머릿속을 홀가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메모가 여러분의 기억력을 높이거나 무언가를 습득하게 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진 않습니다. 메모를 통해 머릿속을 비우지 마세요. 좀 더 깊이 생각하고 곱씹으면서 말하고 시간을 두고 다시 반복하는 것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그 방법이 수동적인 메모보다 더 힘들지만 효과가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메모말고 뇌모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