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근무로 일을 하니 활동량이 팍 줄었습니다. 하루 한두 시간쯤 보내던 출근길도 알고 보니 나름 운동이었더라구요. 집에서 일하고 집에서 밥을 먹으니 어떤 날은 핸드폰에 찍힌 걸음수가 100걸음도 채 되지 않아서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어요. 그 뒤로는 일부러 동네를 한 바퀴씩 돌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때 만난 친구 중에 동네 구경이 취미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때 저는, 동네는 그냥 다니는 데지 그걸 구경하는 게 취미가 될 수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가끔 내가 살았던 동네를 떠올리면 그닥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면서 그때 그 친구처럼 동네 구경을 좀 하고 다닐걸 하며 아쉬워한 적이 몇 번 있었어요.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요즘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동네를 걷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오금동인데요, 송파구 한켠에 위치한 조용한 곳이에요. 이 곳에는 오래 산 분들도 많고 전반적으로 아늑한 동네입니다. 여름에는 조그마한 인공폭포가 흐르는 오금공원이랑 가깝구요, 좀 더 시간을 내서 10분쯤 걸어가면 성내천이, 반대편으로 가면 올림픽공원도 나와요.
오후의 산책로는 포근합니다
지난주에는 산책을 나서면서 평소에 가지 않았던 길로 가보기로 했어요. 성내천 방향으로 가다가 작은 시장처럼 가게가 줄지어 있는 골목으로 걸어가 봤습니다. 흔히 보는 골목의 모습이지만, 제대로 본 적은 없던 길을 따라 들어가 봤어요. 따로 지도도 없이 걸은 지 30분쯤 되었던 것 같아요. 배가 조금씩 고파졌습니다.
마침 눈 앞에 꼬치집이 하나 보였어요. 학생들이 가는 분식집 같은 가게더라구요. 닭꼬치는 어딜 가나 맛이 있으니까 따로 볼 것도 없이 하나 포장해가자는 생각에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안에는 아직 손님이 없어서 저는 사장님께 닭꼬치 하나를 포장해달라고 부탁하고는 잠시 가게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그때 제 눈에 가게 안의 맥주 기계가 들어왔어요. 침이 꼴딱 넘어가더라구요. 해가 어스름하게 넘어가는 초봄의 6시 무렵이라 맥주 마시기에 시간도 날씨도 딱 좋더라구요. 에일이니 필스너니 하는 맥주도 좋지만, 왜 가끔 한국식 맥주가 땡기는 날이 있죠? 한국식 생맥주의 탁 쏘는 맛이 땡기는 날, 그 날이 딱 그랬어요.
"사장님, 저 그냥 먹고 갈게요. 꼬치랑 생맥주 오백 하나 주세요!"
벗어날 수 없는 맥주의 손길
내킨 김에 자리를 잡아버렸습니다. 꼬치와 큰 잔 가득 맥주가 나오고 받자마자 그대로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는데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어요. 목만 축인다는 게 그만 500cc 반 잔을 한 방에 비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느새 제일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어요. 그 친구는 바로 같은 동네에 사는 제 여자 친구예요 :)
마침 퇴근 중이던 제 베프이자 여자 친구는 이 동네에 산지 10년이 넘었는데도 한참을 설명해준 뒤에야 가게를 찾아올 수 있었어요. 둘이서 그렇게 자주 다니던 길목에서 딱 한 골목 안쪽에 이런 가게가 있는 줄은 둘 다 몰랐던 거죠. 여자 친구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저는 맥주를 주문했고 저희는 시원하게 잔을 부딪히고 한 잔 들이켰습니다. 정말 시원했어요.
하루 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얘기하고, 전에 함께 먹었던 맛집에 대해서도 떠들고, 그렇게 두 잔씩을 마시고 저희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여자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살짝 알딸딸하게 취한 기분이었는데 혼자 골목을 걷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더라구요.
내 동네만 한 곳이 또 있을까요?
동네 산책이라는 게 해보니까 이런 맛이 있는 것 같아요. 익숙하다고 생각한 공간에서 새로움을 찾고, 그 공간에서, 늘 했던 것 같지만 사실은 처음 해보는 일들을 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가 사는 이 공간에 정이 들고 그게 또 감사하고 말이죠.
동네 산책을 이제는 정말로 즐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건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할 걸 그랬어요. 운동화 신고 현관문만 열면 되잖아요. 걷기만 해도 추억이 쌓이는 이렇게 가성비 좋은 여행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이 즐거움을 좀 늦게 알게 된 건 아쉽지만 그만큼 더 많이 즐기면 되는 거겠죠!
사진 출처
- 타이틀: Photo by Yeo Khee on Unsplash
- 공원: Photo by Alexander London on Unsplash
- 맥주: Photo by Lana Graves on Unsplash
- 서울 야경: Photo by Yohan Cho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