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장 미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는 겨우 스무 살에 그렇게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여기에서 말하듯이 뭔가를 저질러대는 능력, 재능의 화신이었죠. 그는 거침없이 모험을 저지르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재능을 짧고 굵게 활활 태우고 갔지요. 천재적이기도 했어요. 4살 때부터 읽고 쓰기 시작했거든요. 열한 살쯤에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를 유창하게 했고 열렬한 독서가가 되었죠. 그의 아버지는 아이티에서 이민왔고 어머니는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푸에르토리코 인이었어요.
열다섯 살에는 대마초를 피우기 시작했는데, 아버지에게 들키자 집을 뛰쳐나가 ‘거리의 삶’을 시작했어요. 이후 마약을 많이 했어요. 그는 18살쯤에 스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스프레이를 휘두르며 미친 듯이 그래피티를 그리고 다녔어요.
기가 찬 전략이었죠. 주로 갤러리가 운집해 있는 소호에서 그랬으니까요. 자기 생각과 그림을 새로운 컨셉에 담아 광고했다고 봐야 해요. 주로 백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 그리고 예술계에 대한 조소와 풍자를 담았는데 암호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1년 정도 지나자 지역방송에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인터뷰 요청을 받았어요, 그 자신만만한 그래피티는 오래지 않아 세계 미술계의 중심인 그곳 유명 갤러리 관장들의 관심을 받습니다. 20살 정도에는 유럽과 미국의 유명 아트 딜러들이 탐내는 화가가 됩니다.
22살쯤부터는 유럽과 미국 최고의 핫한 아티스트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어요. 쇼맨십도 대단했던 것 같아요. 아르마니 정장을 입고 그림을 그렸는데 옷에 물감이 튀었지만 그대로 대중들 앞에 서고는 했으니까요.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인 앤디 워홀과 함께 작업하기도 했어요. 나이 차이는 많지만 앤디 워홀과 자주 격렬하게 싸우기도 했던 것 같은데 앤디 워홀이 죽자 그 다음해에 바스키아도 죽어요. 서로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것 같아요. 27이라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작업은 본능적이고 폭력적인 힘이 넘쳤어요. 폭발하는 에너지 속에 숨겨진 지성도 느낄 수 있어요. 어떤가요? 바스키아의 성공은 본능과 직관, 자신의 천재성을 믿고 저질러대는 모험의 결과라고 보아도 좋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 깊이 공부하고 나름대로 전통을 받아들인 다음 모험에 나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예술 작업은 연결, 사회적 결속, 공감의 방법이 된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스스로를 놓아 주고, 본능을 따른다.’ 이건 마치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한 것 같습니다.’
‘바스키아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것 하나 소개하신다면요?’
‘다 좋지만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1982년 작품 무제Untitled입니다. 해골을 그린 겁니다.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힘이 강렬해요. 해골임에도 불구하고 굵은 검은 선을 사용한 것은 흑인임을 분명히 한 것이겠지요. 해골이 되어도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 얼굴입니다. 피억압자의 입장을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흑인들의 삶과 죽음, 존재의 불안을 느낄 수 있어요.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붓놀림도 거침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가격에 거래되는 것이겠지요.’
***참고로 바스키아의 작품에 쓰여 있는 BLM은 Black Lives Matter의 acronym으로 흑인들 인권운동 단체 이름과 구호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