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찌감치 걸어오는 한 사람, 머리에 쓴 붉은색 베레모가 유난히 돋보인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검은색 코트는 허리에서 한 번 묶여있다.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인지 어깨에 맨 가방 위로 삐죽, 대파 한 단이 솟았다. 아래쪽의 볼록하게 튀어나온 것은 사과 몇 알이 아닐까, 어쩌면 오렌지인가? 상상한다.
일행 중 한 명이 난데없이 장래희망이 생겼다며 ‘베레모가 어울리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고 말한다.
특별한 약속이 아닌 그저 습관처럼 장을 보러 가는 길, 머리 위에 붉은 베레모를 쓴 할머니를 그려본다. 거울 앞에 서서 익숙한 동작으로 각도를 조절하고는 미소를 흘리며 현관을 나서겠지. 사소한 외출에도 멋진 모자를 챙겨 쓰는 삶을 떠올리니 마음이 사뿐해진다. 피부의 생기와 탄력은 어쩔 수 없이 잃어버리겠지만 여전히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자를 고르는 하루라면 소박하고 단단한 행복이 머물 것 같다.
#1228 #평소의행복
+ 이어지는 노래,
이문세의 [소녀]
소녀 같은 할머니를 생각하고 쓴 것은 아니다, 그 나이에 알맞은 모습으로 단단한 삶을 이어나가는 노년의 시간을 기대하며 썼다. 죽음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비극과 슬픔이 수시로 끼어들지만 그 틈에서도 소박한 기쁨을 찾아내며 살고 싶다. 아이들을 품에 안고 정수리 냄새를 맡으면서, 앙증맞은 입술에 닿는 감촉을 느끼면서, 나무에 콕콕 부리를 박는 조그만 새를 바라보면서, 소리를 더 가까이 듣기 위해 발소리에 신경 쓰며 나무에 다가가면서, 한겨울 여전히 맺힌 붉은 열매에 감탄하면서. 하루 종일 행복하고 좋을 수 없지만 잠깐은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우연히 마주치는 노년의 삶은 다채로워서 때로는 저렇게 살고 싶다는 동경으로 가득 차기도 하고 반대로 쓸쓸하고 애잔한 마음도 든다. 주름진 얼굴을 바라볼 때면 내 아이들의 살결처럼 뽀얗고 탐스럽고 향기로운 시절이 있었겠지 싶어 허망하다. 다만 피부에 탄력이 떨어지고 두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 지팡이에 의지하며 걷는 날이 온다는 것은, 그래도 젊은 시절을 잘 흘려보냈다는 뜻. 죽을 만큼 아프지 않았다는 뜻. 건강이 뒷받침되었다는 뜻. 노년의 시간을 얻는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는다. 오늘 하루를 단단하고 소중하게 끌어안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