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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일중 Oct 18. 2017

괴리를 괴리한 자의 유언

황동혁의 <남한산성> 비평


괴리를 괴리한 자의 유언



김상헌은 조선의 절개와 지조의 한 상징이다. 이는 반대로, 타협이 단절된 칼날 같은 인물이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오프닝, 김상헌과 노인의 사건. 김상헌은 곡식을 좀 얻어먹기 위해 청군에게도 얼음길을 알려준다는 노인을 죽여버린다. 가난한 백성의 시선을 이해하지 못한 김상헌의 모습이다. 김상헌의 괴리감은 여기서 시작된다. 황동혁의 <남한산성>(2017)은 김상헌(김윤석)의 괴리를 괴리하는 영화다.


서날쇠(고수)는 김상헌의 백성에 대한 내(內)적 이해를 돕는 장치다. 서날쇠는 영화 속 백성들의 초상인 인물 격이다. 그들의 생활을 누구보다 이해하니, 이해한만큼 보살피려는 현자의 모습까지 지녔다. 그래서 김상헌과 정치적으로 통한다. 백성을 보살피려는 책임이 있으나,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시선을 이해하지 못하는 김상헌은 (그들로 태어난) 서날쇠를 통해 그들을 본다. 가마니 배부가 그 첫 성취겠다. 그럼에도 김상헌의 척화론에 대한 논리는 깨지지 않는다. 그가 주장하는 척화론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아끼는 백성을 희생시키는 정치다. 지조와 백성의 희생 사이에 발생한 김상헌의 괴리감. “청을 섬기든, 명을 섬기든, 저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서날쇠의 대사는 김상헌에게 비수 같은 말이 된다.


최명길(이병헌)은 김상헌의 백성에 대한 외(外)적 이해를 돕는 장치다. 또한, 대립적 관계에 있는 인물이라 영화의 서스펜스 장치로도 작동한다. 백성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왕과 조선의 역사가 치욕스러워지고 자신이 역적의 인물로 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김상헌과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백성을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맞닿아있다.(말에게 백성의 가마니를 나눠주자는 김류의 말을 반대하는 씬에서 특히 그렇다.) 마치 등은 서로 닿아있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는 듯한 자세다. ‘삼전도 굴욕’이 행해진 뒤 둘이 만나는 씬. 카메라는 김상헌의 얼굴을 미디엄 클로즈 업 쇼트로 찍는다. 김상헌은 최명길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비껴 앉늗다. 이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이뤄낸 최명길에 대한 김상헌의 부러워하는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이 씬의 마지막 쇼트에는 정면을 바라본 김상헌의 얼굴을 보인다. 김상헌의 괴리감을 비추지만 그가 자신의 정치를 순전히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감독의 균형적 시선이다.


나루(조아인)는 김상헌의 거울이다. 김상헌은 나루를 볼때마다, 자신이 쳐낸 노인의 머리를 본다. 서날쇠를 만나고, 최명길을 만나 집에 돌아온 김상헌이 자신의 모습을 재확인하는 장치다. 일종의 김상헌의 ‘괴리감 증폭 장치’다. 김상헌은 나루에게 민들레꽃이 피면 다시 보자는 약속을 한다. 김상헌은 괴리감에 할복하고, 나루의 평화로운 모습을 비춘 쇼트가 이어진다. 김상헌의 거울은 살아남는다.


결국, <남한산성>은 노인을 죽인 (백성을 이해 못한) 김상헌으로 시작해, 서날쇠에게 절하는 (그들을 이해해 괴로운) 김상헌으로 끝맺는 영화다. 조선의 한 정치인, 김상헌의 괴리감을 괴리하다 끝나는 영화. 이는 신세대가 기성세대의 거울 같은 존재가 되어야 평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감독의 ‘시대 재탐구 필요성’ 의도는 아니였을까.
 

영화는 이러한 의도 연출을 위해, 기존의 한국 사극 영화가 답습하던 ‘계층간의 시선’ 문제를 끊어낸다. 기존에는 지배 계층의 시선으로 본 피지배 계층의 모습이 주를 이었다. 그들(백성)의 모습이 자동적이였다 해도, (지배 계층의 시선과 동일화된) 카메라 앵글은 그들을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로만 묘사되어 왔다. 예를 들자면, 윤종빈의 <군도:민란의 시대>(2014)가 있겠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다르다. 지배 계층의 시선과 계층의 시선이 균등하다. 이는 특히, 백성들이 말고기를 뜯어먹는 씬에서 강조돼 묘사되는데, 서로를 바라보는 두 계층간의 시선을 동일한 높이에서 찍어 힘의 균형을 균등히 맞췄다. 만약, <남한산성>의 연출이 입체적이라고 느껴졌다면, 두 계층의 시선을 영화내내 팽팽히 그렸다는 점에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다섯 손가락 다 핀 손가락질



황동혁의 <남한산성>은 정치 영화다. 정치 영화는 정치적이여야 한다. 현 시대에 대한 시의성 뚜렷한 메시지가 필요하다. 영화 <남한산성> 네이버 리뷰 중 추천수가 가장 많은 글은 ‘이 영화를 왜 만드셨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습니다’라는 글이다. 글 내용 자체가 논리적이진 않더라도 많은 추천수는 이 영화의 시의성이 불투명하다는 많은 관객들의 공감대를 대변한다. 한편, 이를 *공격하는 댓글도 많았다.


황동혁 감독은 영화 <남한산성>을 "치욕의 역사에서 희망을 봤다"고 소개했다. 병자호란(1636) 당시 조선이 명ㆍ청과의 외교 갈등을 벌이는 상황을 현시대 동북아시아 국제정치 상황으로 끌어 들여온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쩐지 보편적이다. 여기서 묻는다. 황동혁의 <남한산성>이 2017년에 개봉해서 후벼파는 이 시대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외교 갈등은 어떤 역사에나 있었다. 어떤 나라든, 어떤 시대든 치욕스러운 역사는 “얼마나 더 치욕스러웠나, 얼마나 덜 치욕스러웠나”의 차이로 그 나라에 존재한다. 즉, 영화 <남한산성>은 어느 시대와 나라에 대입해도 보편적으로 들어맞는 평이한 메세지라는 것이다.


난 여기서, 밀란 쿤데라의 저서 <커튼> 중 한 부분을 인용할 수 밖에 없겠다.


‘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의 역사는 마치 의복이나 장례와 혼례 의식이나 스포츠 혹은 축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으며, 한 사회의 역사의 부분을 이룬다.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에서 소설이라는 표제 아래 다룬 내용은 거의 이러하다. 소설 항목을 쓴 조쿠르 경은 소설의 대량 보급(거의 모든 사람이 읽는다.)과 도덕적 영향(때로는 유익하고, 때로는 해로운)은 인정했지만, 소설 자체의 특별한 가치는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황동혁의 <남한산성>이 그 어떤 보편적 감성을 일으키는 영화라는 점은 동의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시의성이 분명하다는 말은 조금 의아해진다. 말하자면 이렇다. <남한산성>이 지금의 시대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메시지를 가져왔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최근, 사드 문제부터 북핵 문제까지 와닿을 수 있는 상황이 너무 많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이 영화를 평평하게 만든다. 이시백이나 서날쇠 같은 ‘민초적’ 인물은 관객이 가장 쉽게 투영해볼 수 있는 영화 속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들에 쉽게 와닿지 못하다.(‘감정적으로’가 아닌 ‘의지적으로’) 그 이유는 제 위치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도 변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와 영화 속 시대는 외 상황은 비슷해 보여도 실질 내적 상황 이질감이 있어서가 아닐까.


타예술을 답습한 예술의 실패



영화는 영상을 매체로 한 종합 예술이다. ‘창의적인 해석이나 영화적인 혁신이 있는 건 아닐지언정’(송경원 평론가 평 中) 같은 고찰 없는 시선에 ‘말과 말이 부딪혀 만들어내는, 대사의 스펙터클’(이화정 평론가 평 中)만 쏟아진다면 그건 이미 김훈 작가 소설이 이룬 성취일 것이다. 영화는 영상의 성취가 있어야 한다. 대사가 아니라 ‘쇼트와 쇼트가 부딪혀 만들어내는, 영상의 스펙터클’이 필요하다.


황동혁의 <남한산성>은 지루하고 늘어진다. 안 나눠도 되는 서사를 굳이 11부나 나눈다. 내용이 각 부의 제목에 맞게 확 따라주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11부나 되는 분량을 관객이 소화할 순 있을까. 역시 부담스럽다. 쇼트의 리듬감도, 쇼트와 쇼트 사이의 리듬감도 부족하다. “익스트림 롱 쇼트와 클로즈업을 극단적으로 교차해 그 충돌에서 오는 힘이 김훈 작가의 문장과 비슷하게 느껴졌을 것 같다.”고 한 감독의 인터뷰는 김훈 작가의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에게는 친절치 못한 연출이므로, ‘영화의 논리로서’는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쇼트와 쇼트를 자연스럽게 잇지 못해 허무한(논리 없는) 풍경 쇼트로 전 쇼트의 논리를 가글한다는 느낌을 더 크게 받았다. 이런 풍경 쇼트는 언뜻 보면, 허우 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2015) 속 시적 환기 쇼트를 닮아 보이지만 느낌도 다르고 차이도 크다.


이 영화의 플롯은 대체로 두 종류의 싸움, ‘썰전’과 ‘전투 씬’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썰전’은 대화의 연속인 씬이다. 세우기도, 굽히기도, 부딪히기도 한다. 소리와 소리의 치열한 싸움으로 귀는 즐겁다. 하지만 여기에 시각적 감흥이 있었을까. 카메라는 그저 말하는 자를 비춘다. 부자연스러운 ‘오버 더 숄더 쇼트’의 사용으로 앵글은 답답하고, 스크린 디렉션은 깔끔하지 못해 정신 없어 보인다. 대사는 깊이 있고 흥미로운데 다른 연출 요소는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는 황동혁 감독의 성취일까, 원작 김훈 작가 소설의 성취일까.


다른 싸움, ‘전투 씬’은 고통스럽고 피로하다. 이는 황동혁의 전작 <도가니>(2011) 때부터 보이던 단점이다. 영화 <도가니>는 실제 청각 장애아가 겪었던 성추행의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 이는 연출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직설적이고 평면적 방법론이다. 관객이 그들의 악몽을 이해하려면 그 악몽을 똑같이 겪어야만 할까. 구석으로 내몰리고 처참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던 힘 없는 사람들. 139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스크린 앞 관객은 고통스럽고 무력하다.


이 영화가 기존 한국 영화의 관습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점은 칭찬할만하다. 하지만 그 태도가 영화의 장점이 되지는 못한다. 감독의 자본주의적 예술 태도는 애초에 잘못된 것이다. 황동혁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3無 촬영편집 기술(슬로우 모션, 플래시백, 디졸브)’이 <남한산성>을 흥행으로 이끈 비결이라고 전했다. 기존 한국 영화에 위의 언급된 촬영편집 기술들이 유독 자주 쓰긴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들을 소비적으로 썼다는 연출적 면에서 단점이였다는 것이지, 그 기술 자체가 단점이 되지는 않았다. 즉, ‘3無 촬영편집 기술’을 쓰지 않았다는 감독의 태도는 기존 한국 영화와 차별점을 만들 순 있지만 이 영화의 장점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손익분기점(관객수 500만)도 못 넘은 상황에 “흥행으로 이끈 비결”이라는 말은 조금 경솔한 태도다.


지금의 한국 영화 시장 상황에서 보면, 황동혁의 <남한산성>이 무난히 잘(?) 만든 영화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만, 영화사(映畵史)의 위치에서 보면 별 다른 성취점이 보이지 않는 평이한 작품이다. <마이 파더>(2007)로 데뷔해, <도가니>(2011)까지 사회 고발적 영화를 찍던 황동혁은 <도가니> 이후, <수상한 그녀>(2014)란 코미디 장르로 노선을 바꿨다. 그리고 지금의 <남한산성>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전작과의 연결점이 없어보인다. 황동혁은 이번 <남한산성>이 그동안 유일하게 꿈꿨던 ‘이상적인 영화’고 그래서 모든 걸 다 바친 영화라 한다. 감독으로서, 한 예술가로서 그동안의 찍었던 작품들이 ‘자의’적이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자세는 그동안의 배우에게도, 스탭들에게도 무례하고 예술가로서도 부끄러운 것이다. 앞으로는 <남한산성>을 대했던 지금의 자세 같이, 찍고 싶던 혹은 찍고 싶을 영화를 마음껏 찍기 바란다. 당신이 찍고 싶다는 영화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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