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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가모모씨 Dec 13. 2022

걱정의 기분 |  겪은 일

어느 가을날 출근길 이야기

아침 출근에 유독 예민해지는 날이 있다. 다음 날의 나를 믿고 미뤄 뒀던 일을 마주해야 하거나 다른 팀에 부탁하기 어려운 일이 목전에 두고 있을 때 같은. 워낙 여기저기 끼어 일하는 팔자는 이런 날 아침에 제일 스트레스를 받는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밀린 일을 처리하고 수많은 투 두 리스트를 입으로 조용히 곱씹으며 출근 준비를 한다. 유관부서에 부탁할 일을 생각하니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겠다 싶어 아침부터 머릿속이 복작거린다. 날이 추워지다 보니 만반의 준비로 몸은 무겁고, 달갑지 않은 비 소식에 손에 짐은 더 늘었다. 몸 위에 걸쳐진 옷만큼 마음속도 단단히 갑옷을 입히고 방패를 들며 출근길에 올랐다. 그럼에도 영 복작거리는 마음만큼은 언제 회복될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왠 걸, 새벽부터 준비한 덕에 문서 작업이 훨씬 일찍 끝났다. 덕분에 다른 작업도 수월하게 끝이 난다. 막혔던 일들은 의외로 쉽게 해결책이 보였고 수정 피드백도 크게 어렵지 않은 일들이다. 어려운 부탁도 유관부서에서 흔쾌히 받아주었다. 퇴근이 늦어졌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가 않다.


오히려 오늘의 문제는 다른 곳에서 왔다. 우선 비가 주륵주륵 올 줄 알았는데 내가 밖에 나가는 시간대에는 전혀 비가 오질 않았다. 우산은 장식품이 되었다. 무엇보다 오늘 가장 큰 문제는 두텁게 입은 옷이었다. 아직 사무실은 더워서 땀이 뻘뻘 나는 옷차림이었던 것이다. 오랜 재택에 실내 온도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 탓이다.


생각해보면 아침부터 걱정을 그득그득 달고 산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일이란 없다. 아침에 예측한 대로 하루가 굴러가는 것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많다는 것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아침에는 어쩔 수 없이 질겁 겁부터 먹어 걱정을 주렁주렁 달고 침체된 기분으로 출근을 한다. 쌀쌀한 날씨에 대비한 두툼한 외투는 어깨를 짓누르고 주륵주륵 내리는 비를 피해보겠다며 집어 든 커다란 골프우산은 영 걸리적거리는 것처럼, 기분은 묵직하고 거추장스럽게 내 가슴을 짓누른다.


걱정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수많은 사건 사고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낸 건 이 걱정 많은 성격이니까. 문제는 걱정이 내 기분을 집어삼키는 때이다. 걱정은 항상 미래의 것이라 실체를 알 수 없다. 나는 머릿속에 수많은 시나리오를 그리며 최악의 상황을 여러 버전으로 겪어낸다. 내 상상력은 수많은 걱정을 깊이 있게 더러운 기분으로 치환시키는데 아주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걱정이 기분으로 전환되면 헤어 나오기 힘들어진다.


걱정 가득한 아침을 보내고서 별일 없이 되돌아오는 퇴근길은 참 싱겁게 행복하다. 머릿속에선 갖가지 상황을 겪어 내었고, 그만큼 여러 버전의 사표를 마음속에 품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머릿속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내 사표는 오롯이 가슴 한 켠에 남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걱정이라는 걸 문제 대처의 선에서 끝내면 좋은데 꼭 기분의 영역까지 질질 끌고 와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이유는 참 나도 알 수가 없다.


걱정이 나를 조여 오는 날이면 오늘을 생각해야겠다. 더운 옷을 입고, 한 손에는 커다란 장우산을 들고, 머릿속엔 업무 걱정으로 빈틈이 없었던 오늘. 오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괜찮아도, 오지도 않은 미래를 마음으로 겪어내진 말자는 깨달음 속에서 오늘은 어느 때보다도 편히 마음 편히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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