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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준 Sep 16. 2020

타나토노트,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재능과 소명

오래 전,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책장에 꽂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시리즈를 발견했다. 친구가 그중에서 <타나토노트>라는 소설을 꼭 한번 읽어보라며  빌려주었다. 소설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나는 그 책을 읽느라 밤을 꼴딱 새웠다. 머릿속에서는 환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 후 <타나토노트>가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동안 나는 사후세계나 차크라 따위에 잠시 관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키워드는 바로 '소명'이었다.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타나토노트>를 읽고 '과연 나는 이번 생에 어떤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을까'를 생각하는데 정말로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가득했던 어린시절에는 다방면에 재능이 많아서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나의 부모님도, 친구들도 내가 커서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감조차 못 잡았다. 다만 사주를 볼 때면 늘 예술가 기질이 있다는 소릴 들었고, 수상을 볼 때면 예술가의 손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음악을 좋아하고 재능도 있었으니 내 딴에는 커서 음악가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예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외국어에 관심이 생겨(재능도 있었던 것 같다) 외국어를 전공하게 되었다. 공부할 때 만난 한 친구의 어머니가 무속인이었는데, 그 어머님이 나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더랬다.

"말하는 일, 판매하는 일을 하면 아주 잘 할 거야."

나는 말주변이 그리 좋지 않고 마음에 없는 소리도 잘 못 하는 편인데,(그래서 직장생활에 부적응...) 어떻게 내가 판매를 잘 할 수 있단 말인가. 외국어를 전공하고는 있었지만 나 스스로도 말보다는 글에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 어머니의 말씀은 그 후로 오랫동안 나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내 직업도 여러 번 바뀌면서 그 말씀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잊혔다.


어느 날 명동 거리를 걷는 도중 어떤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나에게 길을 묻는 것이었다. 사투리가 워낙 심했기에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겠거니 싶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설명을 마치자 여자가 물었다.

"혹시 말하는 직업이세요? 선생님이신가?"

"아뇨, 전혀 아닙니다."

"말하는 직업을 가지면 아주 잘 하실 것 같은데요."

그때 뇌리에 스쳐가는 한 줄기 생각. 친구의 어머님이 말씀하셨던 판매직, 말하는 일. 내가 말하기에 그리 능한 사람이 아닌데도 우연같은 일이 두 번씩이나 일어났다. 나는 나의 진짜 재능과 소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생각이 많아서 말이 느리고 횡설수설, 뒤죽박죽이다. 때로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말을 내뱉는 바람에 수습이 안 될 때도 있다. 그런 나에게 말하기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명동 여인과의 대화 끝에, 결국 나는 그 사람이 다른 목적을 가지고 나에게 접근했다는 걸 알았다. 그 여자는 일명 '도를 아십니까'였던 것이다. 말을 잘한다며 나에게 해 준 달콤한 이야기들은 나를 낚기 위한 밑밥에 불과했던 것이다. 내가 길을 친절하게 설명해준 것에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진심으로 나를 칭찬한 것인 줄 알았는데...... 잠시 설렜다가 크게 실망했다. 과연 그 여자의 칭찬은 진심이었을까?


이번 생에서 나에게 주어진 소명과 재능은 무엇일까. 우연찮게 내 원고를 흥미진진하게 읽어주신 한 출판사 대표님을 만난 덕분에 소설 출간이라는 열매도 맺었지만, 세간의 평가가 두렵다. 재능없음이 탄로나는 거 아닐까! 글을 쓰고 있는데도 자꾸만 재능이 손 안의 모래알처럼 자꾸 빠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애초에 나에게 재능이 있었던가? 사주팔자가 말해주던 예술가 기질이란 글 속에 있는지 말 속에 있는지 음악 속에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이미 포기해버린, 그래서 이제는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하기에 너무 큰 용기가 필요한 많은 재능들을 아까워해야 할지, 아니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고 강물 바라보듯 흘려보내야 하는 것인지....... 누구나 소명을 갖고 태어난다면, 그 소명을 하늘에서 미리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여전히 나 자신에 대해 잘 모르겠다. 내 소명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소명이란 게 진짜 있는 것인지, 있어서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쓴이: 지미준

1982년생.

컴퓨터자수 디자이너, 번역가, 영어강사 등의 직업을 체험한 뒤, 어느 날 번개를 맞은 것처럼 영감이 떠올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음악가를 꿈꾸었지만 음악은 취미로 할 때 가장 즐겁고 오래 사랑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외국어 배우기에 푹 빠진 적도 있었다. 헬로. 곤니치와. 올라. 잡다하게 호기심이 많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소설을 쓰게 되리라곤 미처 예상못했다. 어쩌면 호기심이 집필의 원동력인지도.

아무도 모른다. 바로 내일, 우리가 무엇이 되어 있을지는.


주요 작품: 2018년 계간 [소설미학] 신인상 단편소설 《김 씨의 구두》, 《빌라에서 생긴 일: 엘리베이터》, 《‘나의 투쟁’》, 《베토벤은 아니지만》. 장편소설 《게토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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