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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준 Dec 09. 2020

차라리 바둑을 두지, 이 양반아

퀸스 갬빗의 천재는 나와 가까이에 있었다

작년에 TV를 바꾸었는데 TV에 넷플릭스가 깔려있었다. 신문물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있으나마나 한 앱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시동생이 넷플릭스 드라마 중 <브레이킹 배드>를 추천해주었다. 시동생피셜, 인생 최고의 드라마이며 이토록 완벽한 결말의 시나리오를 본 적이 없단다. 넷플릭스는 하나의 계정으로 여러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데, 마침 한 자리가 남아있다기에 우리 부부는 월 3500원을 시동생에게 지불하고 그의 계정 한 자리를 얻어 신문물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브레이킹 배드>를 정주행하고 그 여운에서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것으로 시작된 OTT 라이프는 이제 추천작 리뷰를 찾아다니며 영화, 드라마를 발굴하는 정도까지 왔다. 심지어 넷플릭스 주식도 샀다. 아직 별 재미는 못 보고 있지만.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퀸스 갬빗>


최근 어떤 블로거가 <퀸스 갬빗> 아직도 안 봤냐고 도발했다. 음, 포스터가 별로라서 안 봤는데.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어디 한 번 봐주기로 한다. 7부작 미니시리즈인 이 드라마에는 체스 신동이 등장한다. 그야말로 타고난 천재다. 나 같은 범재를 슬프게 하는 천재의 능력. 질투가 났지만 드라마에 몰입해 끝까지 주인공을 응원하며 정주행을 마쳤다.


사실 나와 가까운 곳에도 천재는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큐가 150이 넘는 사람이었다. 내 생각엔 아마 그 이상일 것 같다. 머리가 너무 좋아서 당신 수준에 맞는 대화상대가 없었고, 새로운 일을 접하면 남들보다 월등한 속도로 그 일을 완수해냈으며, 어느 집단에서든 우두머리가 되는 분이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실수한 것이 있었다.


"차라리 바둑을 배웠으면 돈이라도 벌지."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아버지가 장기 대회란 대회는 다 휩쓸고 다니자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머리 좋은 것과 경제력은 다른 얘기다.) 장기 대회 우승상금은 전국 규모라 해도 직장인 한 달 월급 수준이다.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은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퀸스 갬빗>을 보면서 남편도 이렇게 말했다.


"장인어르신도 체스를 하셨으면 세계챔피언이 되셨을 텐데. 상금 싹쓸이 하고."


그러게나 말이다. 가능한 이야기다. 체스는 장기와 규칙도 비슷한데 아버지는 왜 장기만 고집하셨을까. 바둑을 배우셨으면 조치훈, 이창호를 다 제치고 상금 타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했을 텐데.


사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천재여서 힘들었다. 세상 모든 사람을 발밑으로 보는 아버지에게 나와 내 동생은 늘 '엄마 닮은 돌대가리' 소리를 들었다. 나나 동생이나 아이큐가 그리 낮은 편이 아닌데도 말이다. '돌대가리'는 내가 어른이 된 지금까지 몸속 어딘가에 남아서 '나는 머리가 나빠서 이걸 못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요즘 프리셀 카드 게임에 빠져있는데, 게임이 잘 안 풀릴 때는 여지없이 머릿속에서 돌대가리 괴물이 튀어나왔다. <퀸스 갬빗>의 천재 주인공 베스 하먼을 보고 나서 프리셀을 했더니 또 괴물이 날뛰었다. '역시 난 머리가 나빠. 난 베스 하먼이 아니야.'


천재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결과, 천재는 본인과 주변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삶을 살았다. 자기만의 세계가 확실하고, 그 세계는 보통사람들이 보았을 때 정신병에 가까울 정도로 기괴하고 난해했다.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에 사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시공간이 움직이는 4차원의 세계에서 우리 지구인들은 죽을 때까지 오직 하나의 단면만 보고 살아가듯이, 천재가 보는 4차원의 세상을 보통 사람들이 단면만 보아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친구가 없었고, 정신이 아팠다.


며칠 전 출발비디오여행에 영화 <장기왕: 가락시장 레볼루션>이 소개되었다. 익숙한 장기말과 박보장기 책. 반가운 마음에 웃음이 나왔다. 조만간 그 영화를 보며 재작년 12월 14일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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